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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드라마_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3_노희경

Lazy Bear 2008. 11. 6. 13: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저자: 노희경 

모든 것은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린다. 욕망마저 고갈되어 버리고, 끝내 남는 
것은 뼈와 한줌의 먼지뿐. 그래도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의 
어머니, 슬프고도 무서운 사랑의 미소를 짓는 영원의 모상이다. 세계의 저 
끝에서 꿈꾸듯 앉아 한 잎 한 잎 생명의 꽃잎을 따서 심연으로 끝없이 던지는 
영원한 거인, 어머니! 
'헤르만 헤세'  

 (프롤로그)
양지바른 언덕에 예쁜 집 하나 있다. 낮은 울타리 안으로는 때깔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멀리서 보아도 그 빛이 고운 진달래, 철쭉, 목련 
따위들이다. 그 꽃들을 보고 있자면 식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그리움에 
젖는다. 
어머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 평생 등이 시린 세월 속에서 눈물밥을 
지으셨던 어머니. 
연수는 어머니가 일생의 단 하루 안주인 노릇을 했던 새집 베란다에 서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새집을 지으며 어머니가 손수 꾸민 안방 
베란다에도 어느덧 진달래, 철쭉이 피었다. 사월이다. 어머니 없이 처음 맞는 
봄이다. 진달래는 웃을 때 유난히 곱던 어머니의 입술처럼 붉다. 
'진달래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괜한 걱정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애. 
연수야, 언제든 마음이 심란하거든 너도 엄마 방에 와서 진달래를 보렴.' 
해마다 봄이면 진달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며 쓸쓸하게 웃곤 하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아끼던 진달래 화분 하나가 이제 막 이우는 노을 빛을 받아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김인희, 그녀 나이 오십칠 세. 
연수는 조용히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 본다. 
결혼 전엔 한 집안의 딸로서 얼굴도 희미한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해야 
했고, 결혼 후엔 신혼 초부터 객지로 떠돌던 손님 같은 남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그 여자의 고독. 그 공허한 시간들을, 오직 가족들을 위해 더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환원시키고, 스스로는 봄날 날리는 벚꽃처럼 화르르 산화해 
버린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자. 
부질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생전에 그토록 소망하시던 한가로운 노후는 끝내 부부가 함께 누릴 복이 못 
되었던가. 어머니는 저 아래 호숫가의 한줌 흙으로 누워있고, 아버지 혼자 
밤마다 굽은 등으로 호수를 내려다보곤 하신다. 그새 철 지난 논가의 
허수아비처럼 쓸쓸하게 늙어가는 아버지. 한 여자의 빈자리가 이토록 큰 것이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집안의 웃음을 거둬가 버렸다.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가족들은 늘 허전한 어머니의 빈 자리에 문득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 그늘지는 마음에 목이 메곤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고 네 사람이 남았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빈 자리는 네 사람 
저마다의 가슴에 들어 앉아 원래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 
어머니,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무덤에 작은 창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넋이라도 한가롭게 식구들 사는 모습 구경하시라고요. 
저녁 노을은 마지막 붉은 한숨을 토하며 서서히 호수를 비껴가고 있다. 
연수는 문득 지난 겨울의 그 가슴 저린 사연들이 한 폭의 슬픈 그림처럼 저 
호수면에 어리는 것을 본다.  

 


"밥 안 줘, 이년! 날 아주 굶겨 죽여라, 이년! 이 빌어먹을 년!" 
상주댁은 그날도 아침부터 며느리 인희씨를 향해 앙칼진 욕설을 퍼부었다.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이층 방으로 올라와 버린 연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요 몇 달 동안 연수는 안 그래도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회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한 며칠 어디 무인도에라도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 아침처럼 할머니의 노망이 귀에 거슬릴 때면 연수는 그 간절함이 한층 
더했다. 
연수가 생각하기에 언제부턴가 집은 휴식과 안주의 공간으로서 그 따사로운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머물러 있으되 기회만 있으면 도피를 꿈꾸는 집이라는 
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한때나마 집안에 평화가 존재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연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집의 이미지는 늘 어둡고 침울하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할머니의 악다구니. 그리고, 아내의 
모진 시집살이를 그저 방관만 하고 지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툭하면 
트집거리가 되건 말건 머래채를 휘둘리면서도 그게 다 팔자려니, 시어머니 
모시기를 신주단지 떠받들 듯했던 어머니의 속없는 맹종에 대한 연민, 혹은 
애증의 감정들이 쌓여 연수는 갈수록 자신의 황폐해져 가는 걸 느꼈다. 
"이 호랑이가 물어갈 년아! 시에미 굶겨 죽일랴고 환장을 했냐!" 
상주댁의 성화는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 상주댁은 치매에 
중풍까지 들어 몸과 마음이 온전치가 못하다. 
8 년 전, 아들 정박사가 뜻하지 않은 의료 사고로 집안이 풍비박산되면서 
시작된 증세였다. 그 사고로 어렵사리 개업한 병원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충격으로 쓰러진 상주댁은 집안의 불운을 모두 며느리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정작 상주댁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며느리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는 동안에 상주댁의 욕설엔 이골이 난 인희씨도 며느리라기보다는 꼭 
딸처럼 굴었다. 
두 사람은 때때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어찌 보면 제일 친한 단짝 친구처럼 
매사에 스스럼이 없었다. 이제 잠시 후면 그렇게 욕설을 퍼붓던 상주댁이 
어느덧 인희씨의 작은 아기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변할 터였다. 
"곧 나간다니까! 오줌도 맘 편히 못 눈다, 내가." 
화장실에서 시어머니를 달래는 인희씨의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인희씨는 요즘 오줌소태로 고생을 하고 있다. 화장실에 들어간지 이십여 분이 
지나도록 인희씨는 안에서 감감무소식이다. 나오지 않는 소변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밥 안 줘? 밥 줘!" 
상주댁은 일찌감치 목에 턱받이까지 하고 소파에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났는데 도무지 며느리가 밥 줄 생각을 안 하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인희씨가 급한 대로 다른 식구들 밥상만 차려 주고 
화장실로 향한 것이다. 전 같으면 주방에 식탁을 차리기가 무섭게 인희씨는 
시어머니 밥상을 따로 챙겨들고 거실로 가곤 했다. 그런데 요 며칠 계속되는 
오줌소태 때문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상주댁의 밥투정은 연수네 세 식구가 
식탁에 앉을 때부터 시작됐고, 그 바람에 다들 식욕을 잃고 말았다. 
정박사는 밥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신경질적인 정수도 
밥 대신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또 죽 줄 거지, 나쁜 년!" 
화장실에서 나와 서둘러 죽을 데우는 며느리를 향해 상주댁은 몹시 서운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친네, 또 억지 부리네. 기껏 밥 싫다고 죽 끓이라며." 
인희씨가 웃으며 죽 그릇을 쟁반에 받쳐 내왔다. 
"이년이!" 
"아이구, 맛나네. 자, 한번 드셔 봐."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연신 눈을 흘기는 시어머니를 달래가며 인희씨는 
호호 불어 식힌 죽을 정성껏 떠넣어 드리고 있었다. 
"저, 가요." 
"그래." 
연수가 현관에서 신발을 찾아 신는 동안 인희씨는 문득 안방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차,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 그릇을 탁자 위에 그대로 
놓고 안방으로 향했다. 
한참 맛나게 죽을 삼키던 상주댁이 황당한 표정으로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 표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상주댁은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며느리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상주댁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박사는 안방에서 거울을 보며 새치를 뽑아내고 있던 참이었다. 반쯤 벗겨진 
숱 없는 머리에 새치가 제법 되었다. 병원에서 젊은 원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요 며칠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터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진 인희씨가 조심스레 묻는다. 
"오늘, 수술 있어요?" 
정박사는 아내가 장롱에서 꺼내 준 손수건을 묵묵히 받아들었다. 그는 묻는 
말엔 대꾸도 없이 거울만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좀처럼 
한 번 묻는 말엔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었다. 
"없어요?" 
정박사는 아내가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는 척하며 재차 묻자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 
"나 오늘 곗날이거든. 일 보구 당신하고 같이 들어오면 어떨까 싶은데." 
"뭐하러?" 
"오줌소태가 영 안 낫네? 가서 윤박사도 좀 보구." 
"다른 병원 가." 
정박사는 대번에 아내의 말꼬리를 자르며 싫은 내색을 보였다. 그는 아내가 
병원 얘기만 꺼내면 늘 질색을 하곤 했다. 
"윤박사가 편한데." 
"그런 건 약 먹어두 나아. 뭐 한다구 병원까지 와." 
"낫질 않으니까 그렇지." 
정박사는 더 이상 대꾸도 없이 안방 문을 열고 나갔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수가 시계를 들여다 보며 짜증을 냈다. 
"아버지, 늦어요!" 
상주댁은 그때까지 수저를 든 채 며느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서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가요, 나?" 
한껏 아양까지 떨며 웃는 인희씨 얼굴이 소녀처럼 해맑다. 
연수는 나이 육십이 다 된 아내의 그 귀여운 응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정박사는 말없이 구둣주걱만 받아 
신을 신고는 현관을 나섰다. 
인희씨가 거실 유리창 너머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서운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밥 안 줘, 이년? 시에미를 똥독간의 똥덩어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년, 이 못된 년!"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상주댁이 뒤에서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주댁은 순식간에 며느리의 몸뚱이를 거실 바닥에 
자빠뜨렸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머리채를 잡은 채 질질 끌며 마구 휘둘렀다. 
"아아구, 머리야. 노친네, 기운도 좋지. 좀 놔요. 머리 다 뜯기네." 
"지들만 먹고, 난 밥 안 줘, 이년!" 
"아이고 아퍼라, 노친네야!" 
인희로선 으레 하루 일과처럼 겪는 일이다. 
대문을 나서려던 연수는 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귀에 익숙한 비명에 진저리를 쳤다. 
상주댁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한 번 성이 났다 하면 당할 장사가 없을 
정도로 기운이 펄펄 넘친다. 그럴 때마다 온몸이 곤죽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인희씨는 불쾌한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주댁이 정신이 온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면서도 늘 사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인희씨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인희씨의 태도에는 노망든 노인네의 행패를 탓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비명을 지르고는 있지만 그건 차라리 철 모르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호소에 가까웠다. 
적어도 감정을 가진 인간인데, 저렇듯 철저하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니. 
연수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왠지 늘 비애를 느끼곤 했다. 아니, 그 슬픈 감정을 
넘어서, 연수 자신으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가자." 
말없이 집 쪽을 바라보던 정박사가 앞장서며 대문을 열었다. 
연수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 병원까지 들렀다 가려면 출근 시간에 
맞추기도 빡빡한 시간이었다. 
"아버지, 운전 배우고 싶지 않으세요?" 
연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박사를 향해 애써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방금 전의 일로 우울해진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서였다. 그러나 역시 
정박사는 묵묵부답이다. 마치 어떤 일로 단단히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하게 앉아 
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버지가 굳은 표정을 짓기만 해도 주눅이 들곤 했다. 
어색해진 연수는 조심스레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겉보기엔 아담한 이층집이지만 적적할 때면 황량한 벌판같이 느껴지는 집안. 
식구들의 반 이상이 집을 비운 아침 나절이면 그 황량함이 더하다. 정수도 
나가고 이제 남은 사람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둘뿐이었다. 좀 전에 난리를 
피우던 상주댁도 곧 양처럼 순해졌다. 
머리칼이 한 움큼 빠져 버린 것 같다. 인희씨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겨우 
참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죽 한 그릇을 맛나게 다 비운 뒤 상주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을 갖고 
놀았다. 투명한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색색깔의 공을 가지고 기억력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인희씨는 어디선가 명칭실어증(치매의 한 형태로, 뻔히 알려진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증상)과 실인증(대뇌피질의장애로 시력, 청력, 
촉각에 이상이 없는데도 대상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 두드러지는 치매 
환자에게 그 공놀이가 좋은 치료법이란 얘기를 듣고 틈만 나면 시어머니와 게임을 했다. 
상주댁은 공이 든 상자 안을 아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빨간 공." 
인희씨가 손으로 그릇을 헹궈가며 고개만 돌린 채 문제를 냈다. 
상주댁은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상자 안을 찬찬히 
살피더니 잠시 후 빨간 공을 들어 보였다. 
"아이고, 잘했네. 이번엔 하얀 공." 
인희씨가 다시 문제를 냈다. 칭찬을 받고 몹시 기분이 좋아진 시어머니는 그 
많은 공들 가운데 흰 공을 가려내기 위해 부지런히 눈망울을 굴렸다. 이번 
문제는 너무 어렵다는 표정이다. 상주댁은 구원을 청하듯 며느리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래도 힌트를 줄 것 같지 않은지 이 공 저 공을 들었다 놓았다 같은 
동작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인희씨가 분주하게 일손을 놀리는 가운데 상주댁이 드디어 답을 찾았다. 
"흰 공." 
하지만 상주댁이 전혀 다른 공을 들고 있었다. 
"그건, 노란 공." 
인희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흰 공!" 
틀린 답을 들고 한사코 우겨대던 상주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세 토라지고 
말았다. 
"미친년, 저번엔 이게 흰 공이라더니." 
"내가 언제 그랬어요?" 
반짝 약이 오른 상주댁이 냅다 공을 팽개쳐 버렸다. 
"안 해" 
"왜, 또?" 
시어머니의 응석이 또 시작된 것이다. 
" 업구 나중에 해." 
"업어?" 
인희씨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뾰루퉁하게 쏘아붙인다. 
"안 돼, 나두 이제 늙어서 허리 아퍼." 
그러나 그건 말뿐이다. 
설거지를 마친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마당으로 나섰다. 상주댁은 
며느리 등에 업혀 잠드는 걸 제일 좋아한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숨겨진 그 사연이. 
가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건만 상주댁은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꼬박꼬박 졸았다. 
햇살이 곱다. 
인희씨는 아기를 재우듯 살살 몸을 흔들며 열린 장독에 손가락을 넣어 보기도 
하고, 걸레로 단지를 닦아가며 연거푸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약간 중풍기가 
있는 시어머니의 왼팔이 무겁게 목을 내리눌렀다. 깡마른 몸집이지만 며느리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오래 업고 있기엔 힘이 부쳤다. 
마침 간병인이 올 시간이었다. 인희씨는 시어머니가 깰 새라 조심스레 대문 
족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왔어?" 
서너 발짝이나 떼었을까. 
인희씨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 등에선 잘도 자던 
갓난아기가 잠자리에 눕히려고 하면 용케 눈을 뜨는 것처럼 시어머니는 깜빡 
잠에서 깨어났다. 
인희씨는 슬쩍 대문을 열어놓고 시어머니를 업은 채 거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간병인이 왔다. 
"어디 가냐, 어디. 나 두구 어디 가냐, 이년, 이년!" 
이윽고 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인희씨는 시어머니가 잠들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가 생떼를 쓰는 것이었다. 
"어디 가? 나두 데려가!" 
아무리 떼를 써도 며느리가 외출을 포기하지 않을것 같았던지 상주댁은 
울상을 하며 매달렸다. 한시라도 곁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장담을 못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인희씨도 마음이 바늘방석이었다. 
상주댁은 며느리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걸 몹시 두려워했다. 그런 
이유로 변변히 외출 한 번 못해 본 인희씨였지만, 오늘만큼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한겨울이 되기 전에 일산에 지어 놓은 새집에 입주하려면 오늘 곗돈을 
타와야 한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곗날이 바로 오늘이다. 또 오후에 병원에도 
들러야 하고. 
일 년 후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일산의 새집에서 부부가 같이 노후를 
평화롭게 보내는 것, 양지바른 그 집에서 시어머니를 아무 고통 없이 
돌아가시게 해드리는 것. 
인희씨가 평생 소원으로 꼽는 바람이 있다면 그 두 가지뿐이었다. 오늘 계를 
타서 자재 대금만 갖다 주면 추위가 닥치기 전에 새집이 완성될 것이고, 곧 
입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문을 나서면서도 자꾸만 시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 밖에 서서 또 한참 동안 안쪽을 기웃거리던 인희씨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마침 계모임이 있는 커피솝은 연수가 디스플레이어로 일하는 백화점 건물 안에 있었다. 
이래저래 늦장을 부리다 보니 벌써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가까이 늦은 
시각이었다. 서둘러 만원버스에서 내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인희씨는 그 
와중에도 매장 일층의 세련된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연수가 이걸 다 했나" 
인희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기만 알게 속으로 웃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면서도 아직 
그녀는 영석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장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에 들어서던 순간, 연수는 막연하게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번에도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이미 굴종이 
예정된 허세와도 같은 자존심과의 쓸쓸한 타협. 
"정연수 씨, 이번 자재 말야. 대성 쪽으로 하지?" 
사전에 다른 회사 물건을 납품받기로 해놓고 이제 와 딴소리를 하는 실장의 
속셈을 짐작 못하는 건 아니었다. 회사를 생각한다면 단가가 한 푼이라도 적게 
먹히는 거래처를 택하는 게 현명한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마치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스레 미소 짓고 있는 영석의 말쑥한 옆모습을 보는 
순간,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건 곤란한데요, 실장님. 벌써 인화에서 자재가 일부 들어와 있고, 또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아, 그거야 일단 반품시키고 다음 번에 써 주면 되잖아?" 
"전, 그렇게 못해요, 실장님." 
"하, 원참. 고집 부릴 게 따로 있지. 이건 위에서도 결정이 난 거라니까 그러네?" 
소용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연수는 낯까지 붉혀가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영석은 그런 연수와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황망히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 
연수는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자기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 
"이러지 마, 연수야!"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영석이 등 뒤에 서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쪽 자재 안 써요. 가세요." 
벗어날 길 없는 운명의 굴레를 피해 달아나듯 연수는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완강한 손길을 뿌리칠만한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일 때문이 아니야." 
그 선량한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또 아내가 의심을 하던가요? 그래서 나한테 전화 한 통 없이 그 여잘 삼개월 동안 달랬어요? 그랬어요?" 
매번 이런 식이다. 
상대방은 늘 죄인처럼 용서를 빌고, 그러면 자신은 잔뜩 화가 난 연극 
배우처럼 묵은 대사를 끄집어내 한바탕 으르렁거리고.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연극 따위로 서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연수는 철저하게 그로부터 방치되어 있었다. 그 대가로 
그에겐 가정의 평화가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연수 자신에겐 모멸과 회한의 
연속이었다. 어차피 시작부터가 어긋난 사랑이었다면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이러지 말고, 얘기하자, 우리." 
"무슨 얘기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얼마나 무참했는지, 그 얘기요?" 
"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니 가요." 
"이러지 마, 연수야!" 
우리의 사랑이 단지 조금 늦게 시작됐을 뿐이라고, 하지만 사랑은 길고 짧은 
시간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언젠가 그는 말했었다. 오직 우리의 
순수한 사랑만 믿자고, 그리고 다른 건 아무것도 욕심 부리지 말자고 그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사랑은 도대체 지금 어떤 꼴인가. 자신이 한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따위 사랑으로 두 
사람이 결국 무엇을 얻을 것이며, 또 결국 어디로 흘러가야 한단 말인가. 
그에겐 엄연한 가족이 있다. 더불어 그는 자기 가족에게 성실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무모한 기다림과 몇 마디의 달콤한 속삭임뿐.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려는데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때 난데없이 등 뒤에서 
그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양팔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도 울고 있었던 것이다. 연수는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그 눈물이 기어이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일까. 연수는 계단에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밤늦게 야근을 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어느 날, 백화점 벤치에 앉아 푸른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이 남자의 옆모습. 라일락 꽃내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환각의 
어느 거리에 서있는 듯한 이상스런 봄밤이었다. 왜 그때 자신은 늦은 밤에 홀로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입술에서 푸른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날 그는 그 자리에서 밤새도록 한 여자를 기다릴 작정이었노라고 말했다. 
그때는 입사한 지 오 개월 만에 첫 디스플레이를 맡게 된 연수가 한창 의욕을 
갖고 일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백화점 의류매장 자재건으로 거래처 담당 
부장이었던 그와 몇 차례 강도 높은 마찰이 있었다. 주로 자재의 품질을 놓고 
한바탕씩 말씨름을 하곤 했던 것이다. 연수는 그런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일없이 우스웠다. 마치 그가 수업 시간의 시비를 빌미로 한판 
붙으려고 방과 후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 같았던 것이다.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 무슨 젊은 여자가 그렇게 꼬장꼬장하냐며 그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대뜸 연수를 포장마차로 안내했다. 무엇에 끌렸을까. 
연수는 별 생각 없이 그와 동행하여, 이윽고 포장마차에 앉아 함께 소주를 
마셨다. 막상 자리에 앉고 나니 그는 별 말이 없었고, 연수는 그가 따라주는 대로 술을 마셨다. 
"일 때문이 아니오." 
어느 한순간 그가 다시금 푸른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포장마차의 오렌지빛 비닐 천장 위로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흘러다녔다. 연수는 알 수 없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의 눈빛이 자꾸만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 연수는 라일락 꽃내에 취하듯 술에 취했고, 기어이 그 눈빛마저 취해 버렸다. 
그에게 유치원에 다니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걸 연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라는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어차피 나 스스로 선택한 고통일 뿐, 내겐 이 사람의 가족들을 질투할 권리가 없어. 
이렇게 영석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면 그 동안의 자신이 한없이 옹졸하게 느껴진다. 
연수는, 어쩌면 지난 삼 개월 동안 그는 자신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랬을까, 정말 그랬을까. 
그때 갑자기 비상구 문이 열리고 인철이 나타났다. 
영석은 황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 전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철은 두 사람의 난감해 하는 모습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무표정이다. 
연수는 인철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선배, 그렇게 실망스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애써 태연한 척 웃음 지으려 했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애원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길을 외면하며 인철은 도로 문을 닫아 버렸다. 연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오래도록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내린 결정이에요." 
인철은 풀어놨던 자재들을 다시 포장하고 있었다. 그 싸늘한 표정 때문이었을까. 
황급히 뒤따라 들어간 연수는 공연히 허둥지둥하며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단가가 이 할이나 낮게 들어왔어요." 
"알아." 
"이선배." 
"가 봐." 
그는 여전히 일손을 놀리며 연수를 향해선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문득 
비참해진 그녀가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뒤에서 인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나기로 한 거니? 한번 깨진 쪽박을 다시 짜맞춰 보기로 한 거야?" 
'나두 힘들어요. 그러니 이선배가 좀 잘봐 주세요.' 
하고 싶은 말들이 입속에서만 맴을 돌았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참담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니?" 
인철의 음성은 점점 격앙되어 가고 있다. 
그럴수록 연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처럼 어지러웠다. 불현듯 그런 상황이 
견딜 수 없도록 싫었다. 인철의 그런 태도가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를 향해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내 일이에요." 
"고작 한순간에 꺾일 걸 그렇게 울고 불고, 그랬니?" 
"식사하세요." 
연수는 결국 그 뼈아픈 힐난을 뒤로 한 채 허겁지겁 자리를 피해 나와야만 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인철은 연수의 보호자로 자임했다. 친구들도 모두 둘 사이를 
그만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늘 자연스럽게 연수 곁에 있는 선배였고, 늘 
연수를 돌봐 주는 선배였다. 사실 그런 인철이 연수는 싫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집안에 고민이 있으면 그와 상의했고, 졸업 후에도 그와 상의하여 같은 
직장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늘 그렇게 연수 곁에 있어서 특별히 찾지 
않아도, 그리워하지 않아도 당연히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수는 그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고마운 벗처럼, 고마운 오빠처럼 늘 그렇게 있으면 족한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인철이 그 이상으로 대해 주려고 하면 연수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영석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인철의 격앙된 음성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연수는 못내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떳떳하지 못한 관계란 이런 것일까. 
한 계단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누가 볼세라 팔짱도 못 끼고 남남처럼 
굴어야 하는 게 잘못된 만남의 현실이다. 밀실에서나 눈을 맞출 수 있는 관계,  그게 내 사랑의 한계였을까. 
"뭐 멀을래?" 
그가 주변을 의식하며 지나가는 사람처럼 물었다. 
"국물 있는 게 낫겠어요." 
"연수야 웃어." 
연수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무슨 포스터의 배경 인물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그도 웃었다. 
"이제 너 같다." 
백화점 로비는 점심시간이라 각 매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인해 꽤나 붐볐다. 
"연수야!"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연수는 문득 영석을 의식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희씨는 마침 현관에서 친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던 길이었다. 딸의 모습을 
발견하곤 좋아라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인희씨 얼굴이 유난히 밝다. 
에스컬레이터가 두 사람을 일층에다 내려다 주었다. 
영석은 웃으며 다가오는 연수의 어머니를 모르는 척 지나쳐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딱 맞춰 왔나 보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인희씨는 은근히 들떠 있는 표정이었다. 
"오늘 여기서 계 모임이 있었거든. 너랑 그 선배랑 차 한잔 사줄까 싶어서 왔는데." 
인희씨는 연수 대학 시절부터 보아온 인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딸이 인철과 연애라도 하는 사이길 바라는 눈치를 보이곤 했다. 
"어떡하지? 엄마, 나 바쁜데 선배두 지금 바빠요." 
로비 한쪽 끝에서 영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연수는 어머니의 
서운한 기분을 배려해 줄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 일 있어?" 
"네." 
"그럼, 할 수 없지, 뭐." 
"미안해요." 
"그래, 가." 
"집에서 봬요. 쇼핑하구 가세요." 
인희씨는 친구들과 점심 한 끼 먹는 돈이 아까워 그냥 헤어진 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연수였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한 채 백화점을 나서는 
연수의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찬거리나 좀 사 갈까 하고 백화점 식품 매장을 돌아보던 인희씨는 웬 허름한 
옷차림의 여자가 시식코너에서 젓갈을 집어먹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찡하게 
저려왔다. 가난한 살림에 유난히도 먹성이 좋은 올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인희씨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근덕은 툭하면 술에, 노름에 절어 사는 
무능하고 모난 인물이었다. 그런 남자한테 시집와 여지껏 호강은 커녕 남의 집 
드난살이다 식당 종업원이다 해서 안해본 고생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아온 
올케를 인희씨는 늘 고맙고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 올케가 요즘은 달동네에 포장마차를 차려 억척스럽게 살림을 일궈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근덕의 등쌀에 배겨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편이랍시고 하나 있는 위인이 돈을 벌어 주는 건 고사하고 허구한 날 
아내가 뼈빠지게 모은 돈마저 탕진해 버리는 까닭이다. 창란젓은 우직하고 착한 
근덕댁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그 날도 산동네 근덕의 단칸 셋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시작한 택시 운전은 아예 뒷전이고 노름꾼들과 술집 밀실에서 
한창 판을 벌이다 온 근덕이 또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근덕댁은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장사 나갈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근덕은 그런 아내에게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그 속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근덕댁이 
돈을 내줄 리 없었다. 그러자 근덕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가 옷장이며 
서랍이며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너, 안 줘!" 
근덕댁으로 말하자면 성미 급하고 우악스러운 남편의 횡포엔 이골이 난 
여자였다. 그러나 수돗가에서 꽁치를 다듬는 손이 덜덜 떨리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근덕댁은 남편의 협박을 당차게 묵살해 버렸다. 
"없어!"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데다가 일만 할 줄 알았지 이럴 땐 황소고집인 
여편네가 여간 미운 게 아니다. 근덕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제 처를 잡아먹을 듯이 고함을 쳤다. 
"어제, 어제 번 거 어쨌어, 이 쌍년아!" 
"." 
"어쭈, 이게 인제 아주 배짱이네? 그래, 좋다. 니가 날 서방이 아니라 물 빠진 
남방으로 아나 본데, 너 오늘 죽었어. 내놔. 이 씨발년아!" 
그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눈에 뛰는 대로 연탄재를 집어들더니 
근덕댁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연탄재가 근덕댁의 눈 앞에서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여지껏 정성 들여 씻어 놓은 생선이 순식간에 연탄재로 
범벅이 되어 날아갔고, 글 참에 그릇이 몇 개 뒤집어졌다. 
"없다니까! 저번에 누나한테 가 뜯은 돈 벌써 더 썼어?" 
근덕댁은 졸지에 연탄재 벼락을 맞은 모골을 하고도 허겁지겁 생선을 
주워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아내를 내려다보며 근덕이 따지듯 물었다. 
"그게 얼마나 돼서, 엉? 얼마나 돼서?" 
"이백이나 뜯었다며?" 
근덕댁은 남편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 살림꼴에 돈 이백만 원을 며칠 새 다 
쓰고 또 손을 내미는 그가 과연 인간인가 싶었다. 그녀는 속이 상해 저절로 눈물이 치밀었다. 
좀처럼 돈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근덕은 거의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잔말 말구 내놔! 이번엔 진짜란 말야, 이 개같은 년아!" 
근덕은 금쪽 같은 장사 밑천들을 마구 짓밟아가며 악을 써댔다. 남편의 거친 
발길질을 온몸으로 막으며 근덕댁은 생선 한 토막이라도 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뭐가 진짜야, 뭐가? 땡을 잡고도 지는 노름, 뭐가 진짜냐구?" 
"이거 정말 미치겠네. 돈 내놔, 어서! 안 내놔, 이 쌍년아?" 
"없어." 
"이러다 나 너 죽인다. 빨리 내놔, 이 썩을년아! 풀하우스 떴는데 스톱 
걸어놓구 왔단 말야, 이 등신아! 너 풀하우스가 뭔지 알아?" 
"몰라!" 
연탄재 범벅이 된 그릇 속에서 생선 한 토막이라도 건지려고 허둥대다 보니 
눈물을 훔칠 새도 없다. 근덕은 그런 아내의 어깨를 거의 죽일 듯이 잡아 흔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아내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두툼한 전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놓칠 근덕이 아니었다. 근덕은 먹이를 낚아채는 
날짐승처럼 잽싸게 전대를 잡아챘다. 
"안 돼, 그거 장사할 돈이야!" 
"열 배루 갖다 준댔잖아, 내가!" 
빼앗긴 전대를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내를 냅다 걷어차고 나서 근덕은 대문을 열었다.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땅바닥에 쓰러져 울다 악에 받친 근덕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에라, 이 도둑놈아!" 
전화기는 근덕의 발뒤꿈치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근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내뺐다. 
백화점 공중전화로 동생 집에 전화를 걸었던 인희씨는 올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덕아! 올케? 올케?" 
'내 돈 내놔, 이 나쁜 놈아!' 
수화기 저편에서 올케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희씨는 애가 탔다. 
"올케, 올케!" 
아무리 불러도 저쪽에선 응답이 없다. 인희씨는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올케를 소리쳐 불렀다. 
'그래, 돈 못 따 오기만 해봐라! 고추장에 확 비벼 버릴 테니까!' 
곧이어 엉엉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더 듣지 않아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쯤 마당에 퍼질러 앉아 서럽게 울고 있을 올케 얼굴과 돈을 
들고 씩씩거리며 노름판으로 향하고 있을 동생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 눈에 
선했다. 그 순간 인희씨는 온몸에 기운이 쫘악 빠지는 것만 같았다. 


오후에 인희씨는 윤박사한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윤박사는 정박사와 같은 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독신녀이다. 
인희씨는 남편의 절친한 후배인 그녀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간단히 내진만 받고 며칠 약이나 지어 먹으면 해결되는 병인 줄로만 알고 
있던 인희씨에게 윤박사는 꽤 여러 가지 검사를 권유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증세를 물어오던 윤박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건 초음파 
검사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언니, 검진 언제 받았지?" 
"한 삼사 년 됐나? 내가 워낙 건강하잖아. 올 일이 없었지." 
"언제부터 그랬어요?" 
"꽤 됐지, 아마?" 
"소변 볼 때 오른쪽 아랫배가 눌리는 기분 없어요?" 
"조금." 
차트에 뭔가를 끄적이며 연신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는 윤박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인희씨는 남편 정박사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만원 전철을 타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복잡한 역을 빠져 나와 동네 어귀로 접어들면서 인희씨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인 남편과 이렇게 단둘이 귀가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자식을 둘이나 낳고 살면서도 평생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꿈도 못꿔 보고 
살았다. 오늘 같은 날 저녁 한 끼 사달라는 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속으론 남편이 모처럼 밖에서 만났으니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먹자고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인희씨는 여간해선 그런 일에 섭섭한 내색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당신 운전 배우지? 아침엔 연수가 바래다 준다고 해도, 밤엔 차 타기가 그럴 텐데?" 
"요즘 교통이 어떤데 나까지 한몫 보태? 신경쓸 거 없어." 
만원 전철에 끼여 같이 퇴근하고 보니 새삼 남편 대하기가 안쓰럽기만 하다. 
인희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꾸 눈치를 보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또 있었다. 
"당신 병원, 내후년에 그만두면 안 돼?" 
"왜?" 
"정수 대학이나 보내구 그만두면 여러모로 나을 것 같은데. 집짓는다구 돈을 너무 써서." 
성격도 외곬수인 데다가 대인관계도 그리 원만치 못한 남편. 그런 사람이 
직장 생활을 원만하게 해 나가기란 아마도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인희씨는 
욕심 같아선 남편이 일 년만 더 참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그게 요즘 
생활 형편이기도 했다. 
"요즘두 젊은 원장이 따따부따 그래요?" 
"정수 자식은 요즘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녀?" 
정박사는 심기가 불편할 때면 으레 말을 돌리곤 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럴 땐 이쪽에서도 
같은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까지도. 
"나도 모르지. 어디 보자, 연시가 나왔나?" 
갑자기 인희씨는 딴소리를 하며 과일가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아내를 
정박사는 잠시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수는 록카페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진탕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실패한 뒤로 정수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는 늘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수능 시험이 끝난 뒤로는 밤늦게 
엉망으로 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인희씨는 정박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하며 혼자서 진땀을 빼야 했다. 
이제나 저제나 정수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던 
인희씨가 윤박사의 전화를 받은 건 저녁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윤박사는 인희씨가 전화를 받자 어딘지 모르게 곤혹스러워 하는 음성으로 
정박사를 바꿔 달라고 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정박사는 또 별다른 말도 없이 대답만 몇 번 하더니 
통화가 끝나자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인희씨는 뜨악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물었다. 
"사고 났나 보네. 다 저녁에 이게 무슨 일이래?" 
"먼저 자." 
"모범 택시 타고 가요. 힘들어서 어떡해?" 
윤박사의 전화를 받고 일언반구도 없이 대문을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면서 
인희씨는 그저 저 양반이 피곤해서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급한 환자려니 하고 택시에서 내려 병동으로 향하던 정박사는 뜻밖에도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섰는 윤박사와 마주쳤다. 
"왔어요?" 
태도로 보아 환자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정박사는 앞서 걷는 윤박사를 따라 주차장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마시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윤박사는 말이 없었다. 
"무슨 얘긴데 이렇게 뜸을 들여? 다 늙은 처녀가 이제 와 바람날 일두 없구. 
사고도 아니구." 
"언니, 검사 자료가 나왔어요."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정박사는 대수롭지 않게 윤박사의 말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전화로 말해도 될 일을 가지고 구태여 밤중에 불러낸 그녀를 다소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성 종양이에요." 
윤박사는 충격으로 눈이 동그래져 있는 정박사를 애써 외면한 채 책 읽듯이 
담담한 어조로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녀로서도 검진 결과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렵게 꺼내는 말이었다. 
"오줌소태가 있다고 했는데, 종양 때문이었어요. 종양이 자궁 위쪽에서 커져 
방광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 촉진에서도 이미 잡힐 정도로 컸어요. 
팝스미어(세포 조직 검사), 초음파에서도 조직이 보였구요." 
"무슨 소리야, 지금?" 
윤박사는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하는 정박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사뭇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가족에게 통보하기로 한 이상, 감상은 금물이었다. 
"다른 장기에서도 조직이 보였어요." 
" 사진 어딨니?" 
윤박사를 노려보는 정박사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박사의 눈빛에선 전혀 다른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정박사는 그게 못 견디도록 답답했고, 노엽기까지 했다. 
"니 방에 있니?" 
윤박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 내놔!" 
그가 전에 없이 흥분해서 버럭 소릴 지르자 윤박사는 한숨을 몰아쉬며 앞서 걸었다. 
이윽고 그녀의 진찰실까지 따라들어간 정박사는 그곳에서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는 윤박사가 아내의 검사 자료를 보여 주는 
순간부터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저기, 저 위쪽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자각 증상이 더 늦었던 것 같아요." 
뷰박스에 빼곡히 걸린 사진들. 이미 꽃처럼 활짝 피어 번진 아내의 자궁 속 암세포들. 
정박사는 그 혐오스런 암세포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내 아내의 몸속에 저렇듯 불길한 징조가 번지고 있었다니. 기막힌 현실을 
조롱이라도 하듯 뷰박스에 비춰진 암세포들은 마치 꽃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하!" 
정박사는 그 혐오스러운 것들을 더 보지 못하고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거푸 거친 숨만을 몰아쉬며 차마 제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치 예리한 쇳조각으로 가슴을 
후벼파듯 쓰디쓴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반, 정박사는 거의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퍼마셨다. 술을 
마실수록 몸은 자꾸 무너지는데도 자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벌써 양주 한 병을 맹물 들이키듯 다 비워낸 뒤였다. 정박사가 또 술을 
청하자 곁에서 보다 못한 윤박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어떡할 때냐?" 
아내에 대한 자책감과 자신을 향한 분노로 일그러진 정박사의 얼굴은 붉게 젖어 있었다. 
윤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자조적으로 같은 물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떡할 때냐구? 니가 말해 봐. 어떡할 땐지?" 
"언니한테 가세요." 
"가서?" 
정박사는 끝내 젖는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서, 가서 어떡해? 그 암덩어리 여편네하고 같이 부여잡고 울까? 울어?" 
"." 
"아프다고 했어. 근데 내가 동네 약국 가서 약이나 사 먹으라 그랬어. 명색이 
의사라는 놈이 마누라한테 그랬다구. 근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너 암이다. 그렇게 말해?" 
정박사의 눈가에 이내 굵은 이슬이 맺혔다. 그는 한쪽 입술을 깨물고 잠시 
머뭇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떤 놈인 줄 알아? 의료사고로 사람 죽여 놓고 내 병원 말아먹은 
놈이야, 내가. 이 나이에 남의 병원에서 초라한 월급쟁이 의사질 하는 게 
부끄러워 여편네 아프다는데 병원두 오지 말라고 한 놈이야, 내가. 그런 새끼가, 가서 무슨 말을 해." 
"." 
"가서, 죽는다. 너 잘 죽어라, 그래?" 
"정선배!" 
"난 못해. 난 못하겠다." 
정박사의 자학은 곧 두려움으로, 허탈감으로, 다시 분노로 바뀌어 자신을 끝도 
없는 절망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윤박사는 정박사가 술을 한잔 털어놓자 
자기도 따라서 한잔 털어넣었다. 그렇게 몇 잔을 더 털어넣었을까. 밤이 
깊어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술기운이 온몸에 번져가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가로 쓱 닦아내는 정박사를 마주보다가 윤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정박사를 부축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정박사는 밖으로 나오자 아무런 말도 없이 출렁출렁 흔들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멍하니 선 채 윤박사는 그의 허탈한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연수는 차를 몰고 귀가하면서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영석의 속삭임에 취해 있었다. 
"미안해. 그 동안 정말 괴로웠다." 
"이제 그만해요. 벌써 이해하고 있어요. 거기 기죽어 자꾸 변명하는 거 듣기 
싫어요. 그 말 말구,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사랑해 보고 싶어." 
헤어진 지 채 한 시간도 못 돼서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 마음을 연수는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 또한 당장 차를 돌려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지금 이 순간 그 눈빛에 목말라 하고 있다. 
길은 어느덧 터널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연수는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일었다. 
"이제 터널로 들어가야 해요. 통화 끊길 거^36^예요.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알았어. 전화 꼭 할 거지?" 
그 말에 대답해 주기도 전에 전화기에서 불규칙한 잡음이 들려왔다. 연수는 
천천히 핸드폰을 닫았다. 
보행자 위험을 알리는 경고판의 붉은 글씨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항상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되는 터널의 노란 불빛 아래로 한 여자가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왠지 그 뒷모습이 무척 낯익다. 무척 
쓸쓸해 보이는 그 여자의 뒷모습, 그 실루엣. 
집에선 인희씨가 시어머니 때문에 또 한번 호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밤잠이 없는 시어머니에게 연시를 까 드리며 한동안 말동무를 하고 놀아 주던 
인희씨가 청소를 하느라 잠시 곁을 떠난 사이, 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우라질 년. 시에미한테 개똥을 줘? 너 먹어라 이년, 너 먹어! 이 나쁜 년." 
며느리가 옆에서 노닥거려 줄 때만 해도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연시를 잘 
받아먹더니 상주댁은 그 연시가 갑자기 똥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상주댁은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모습으로 그 연시를 방에서 거실로 냅다 
집어던졌다. 잘 익은 연시는 걸레질을 하는 며느리 등에 그대로 명중하며 터져 버렸다. 
"뭐야, 이게. 못 살어, 내가." 
"이 개가 물어갈 년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이고, 증말. 뭐가 어쨌다구 저런대?" 
졸지에 연시로 팔매질을 당한 인희씨는 걸레를 손에 든 채로 울상을 지었다. 
"이게 다 뭐래. 아이고 아까워라." 
"냄새 나는 개똥을. 에라, 이 못된 년!" 
시어머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인희씨는 바닥에 떨어진 비싼 연시를 주워 먹기 바쁘다. 
"증말, 왜 이런대. 이거 아까워서 어째." 
"드런 년, 그게 맛있냐?" 
어느 틈에 방에서 나온 상주댁은 천하에 상종 못할 것을 대하듯 혀를 끌끌 
찼다. 시어머니보다는 연시 때문에 속이 상한 인희씨가 짐짓 화난 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럼, 맛나지!" 
"에라, 이 미친년아, 개똥을 먹어? 에라, 이 미친년!" 
"남들 다 자는구만! 그만해요, 어딜 가!" 
상주댁은 남은 연시 바구니를 가지러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시어머니를 
종종걸음 치며 뒤따르는 인희씨의 하얀 블라우스 등짝이 가관이었다. 온통 붉고 
지저분한 연시 속살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흐르고 있었다. 
"이거 줘요. 무슨 노친네가 이리 힘이 좋아!" 
"개똥이다, 개똥!" 
연시 바구니를 손에 들고 다시 거실로 나온 상주댁은 그걸 하나하나 야구공 던지듯 집어던졌다. 
인희씨의 얼굴이며 옷이며가 이내 연시로 범벅이 돼 버렸다. 그 몰골을 
해서는 시어머니 손에서 연시 바구니를 뺏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리 내요, 이리! 아이고, 집 다 망가지네." 
"개똥이다. 개똥!" 
인희씨는 한 손에 걸레를 든 채 시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혼자서 갖은 씨름을 
다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재미가 붙었던지 상주댁은 마룻바닥을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연시를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또 하나의 연시가 휙 날아갔다. 그런데 하필 그게 술취해 
비틀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정박사의 웃옷에 정통으로 맞았다. 
가슴팍에 시뻘건 속살이 뚝뚝 떨어지는 연시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던 
정박사의 눈에 순간적으로 핏발이 서렸다. 
"왜 이 여잘 못 잡아먹어 평생을 그래요, 평생을! 이 노친네야, 말해 봐! 
도대체 뭐가 못마땅해 그러냐구, 응? 뭐가 못마땅해?" 
정박사는 다짜고짜 노모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나꿔채 바닥에 내팽개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주댁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겁을 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더욱 놀란 건 인희씨였다. 
"왜 그래요?" 
그녀는 겁에 질린 시어머니를 가로막고 서서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정박사는 아내를 외면한 채 마구 노모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말해 봐요. 이 여자가 어머니한테 뭘 잘못했는지, 말해보라구!" 
아들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치자 정신이 더욱 혼미해진 상주댁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아저씨, 내가 잘못했어." 
상주댁은 아들을 아저씨라 부르며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며 인희씨는 원망스런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정신도 없는 노친네한테 이게 무슨 행패래? 술 먹었음 곱게 잠이나 자지." 
인희씨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섰는 시어머니를 방에 눕혔다. 
"아저씨, 잘못했어 안 그럴께." 
상주댁은 아직도 겁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자꾸만 문 밖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술이 취해도 그렇지, 워낙 신경이 
예민해서 병까지 얻으신 양반을 그렇게 닦달할 게 뭐람. 따지고 보면 다 며느리 
잘못 얻어 맺힌 한 때문에 이렇게 되신 걸.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가만가만 이불을 토닥여 주었다. 
안에서 그 난리가 이어지는 동안, 집 밖 골목에선 엉망으로 취한 정수가 여자 
친구의 팔에 기댄 채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재영아, 너, 나 좋아해?" 
재영은 혀 꼬부라진 정수의 물음에 아^36^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너, 나 의대 못가도 좋아할 거냐구?" 
"이번엔 자신 있다며?" 
"또 떨어지면 싫어할 거야?" 
재영은 벌써 대학 2 년생이다. 정수는 그게 불안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이러지 말고 얼른 집에 가." 
"가기 싫어." 
"정수야." 
여자 친구가 짜증을 내거나 말거나 정수는 제 감정에 못 이겨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곧이어 그는 벌떡 일어나 기습적으로 재영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이러지 마, 정수야!" 
당황한 재영이 몸을 빼내려는 순간, 공교롭게도 차를 몰고 오던 연수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연수는 저도 모르게 빵빵, 경적을 울렸다. 깜짝 놀란 
정수와 재영이 후다닥 떨어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잔뜩 취해 가지고." 
차에서 내린 연수가 웃음이 나는 걸 참고 물었다. 
"별 걸 다 참견하고 난리야." 
정수가 볼멘소리로 항변했다. 재영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어색하게 서 었다. 
"정수 친군인 모양이구나. 초면에 실례가 많다. 어쨌든 늦었으니 내가 저만큼 바래다 줄게." 
연수는 한사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정수룰 부축하여 우선 남의 집 
계단 앞에 앉혀 놓고, 재영을 찻길까지 바래다 주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정수는 여전히 취한 채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연수는 정수를 간신히 부축해 집으로 향했다. 
"느이들은 뭐한다구 맨날 오밤중이야. 이 자식들아!" 
마침 거실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 있던 정박사와 맞닥뜨린 게 정수로선 큰 불운이었다. 
평소에도 부자지간은 사이가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게다가 취중에 느닷없는 
꾸중까지 들었으니 정수도 아닌 게 아니라 속이 꼬였다. 정수는 신경질적으로 정박사를 외면해 버렸다. 
"이 자식이? 애비가 말하는데 등을 돌려?" 
"놔요!" 
뒤에서 어깨를 나꿔채는 정박사를 향해 정수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격분을 
못 이긴 정박사가 아들의 따귀를 후려친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아버지!" 
연수는 그렇게 밖에 자식을 나무라지 못하는 정박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평소 그녀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성격에 심한 반발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술 취한 동생을 이층으로 올려 보내는 게 상책인 듯싶었다. 
"정수야, 어서 들어가!" 
분해서 아버지를 노려보고 섰는 정수의 눈에도 불이 붙었다. 정박사는 아들의 
반항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둥지둥 시어머니 방에서 나온 인희씨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미쳤어, 실성했냐구? 왜 이래, 오늘 따라." 
아내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선 채로 꿈쩍도 않는 아들을 노려보며 정박사가 큰소리로 쏘아붙였다. 
"너 벌써 대학 들어갔어? 이제 시험 끝난 새끼가 진종일 쏘다니구, 그것도 모자라 술까지 처먹어!" 
"놔 둬요. 공부하느라 걔두 고생했구먼. 당신이나 들어가요, 빨리." 
인희씨는 울상이 되어 남편을 뜯어말리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화만 돋우는 격이었다. 정박사가 기이어 못할 말을 쏟아 놓고 말았다. 
"놔!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지 몸 하나 간수 못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엉? 이 등신아!" 
등을 떠밀며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아내의 손길을 홱 뿌리치며 정박사가 
절규하듯 그렇게 내뱉었다. 정박사는 취중에도 아차, 했으나 말은 이미 주워담을 
수 없게 허공으로 날아간 뒤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혀 영문을 모르는 
인희씨와 두 남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어젯밤 일로 집안 무거운 정적에 싸여 있었다. 
간밤 늦도록 잠을 못 이룬 정박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노모의 방으로 향했다. 
노모는 이불을 반만 덮고 쪼그린 채 아기처럼 곤하게 자고 있었다. 아무리 술 
취한 행동이라지만 팔순 노모께 분별 없이 처신했던 일만큼은 밤새 송구스런 
죄책감으로 그를 번민하게 했다. 정신도 온전치 않으신 분이 얼마나 놀라셨으랴. 
불안하게 잠드신 모습을 보자 더욱더 처연한 생각이 들어 코끝이 아릿하다. 
"어머니, 저 철이예요. 많이 놀라셨죠." 
아들이 이불을 덮어 주려 손을 갖다대자 노모는 잠결에도 흠칫 놀라 몸을 
바짝 웅크렸다. 젊어 혼자 되어 수절하며 세상의 모진 풍상을 겪어내느라 
남달리 마음 고생도 많았을 어머니 였다. 처지가 그렇다 보니 남들 눈엔 
지독하고 괴팍한 성격으로 비쳐졌을지 모르나,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한테 만은 
온갖 정성을 다 바친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께 언제 한번 살가운 아들 
노릇이라도 해드린 적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심신이 고달프고 적막하기만 했던 당신의 인생을 아들 며느리를 
통해 보상받고자 했던 과거 노모의 다소 비뚤어진 삶의 모습들도 그 아들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은 열등감으로 작용했던 아버지의 부재. 그것은 곧 
어머니를 향한, 세상을 향한 고약한 부담감으로 그를 억눌러 왔던 게 
사실이었다. 스스로 아비 없는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잘난 놈이 되고 
싶어했고, 하루빨리 자신이 처한 비루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 지난 날. 
그 쫓기듯 살아온 삶의 결과가 겨우 이 꼴이다. 정박사는 그렇게 흘러온 
자신의 인생 자체를 모두 부정해 버리고 싶었다. 지나온 세월들이 모두 꿈만 
같았고,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 끝에 이렇게 치매 환자가 되어 누워 있는 제 
어머니조차도 마치 아련한 한 조각의 환상 같았다. 더불어 그 앞에 꿇어앉아 
있는 자신의 몸뚱이도 한낱 신기루만 같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었지만 식구들은 모두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말 안 할 거야? 치사하게. 차라리 화를 내라, 야." 
정수는 영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는다. 인희씨는 이층 세면장까지 따라와 
아들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면장 문지방에 자꾸 말을 시키는 인희씨를 정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간밤에 아버지한테 따귀를 맞아 틀어진 속이 아직도 안 풀린 것이었다. 
인희씨는 행여 정수가 제 아버지를 원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조바심을 내면서도 
겉으론 친구 달래듯 장난스럽게 굴었다. 
"됐어요." 
세수를 마친 정수가 수건을 받아들며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그제서야 얼굴이 밝아진 인희씨가 문지방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는다. 
"정말? 아버지가 속상한 게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아팠어?" 
"비켜요, 나가게." 
말은 됐다고 했지만 제 엄마를 퉁명스레 밀치며 세면장을 나가는 정수 
얼굴에선 여전히 찬바람이 일었다. 
인희씨는 그런 아들을 심란하게 바라보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때 마침 
시어머니 방에서 나오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걸 뭣 하러 소란을 피워요? 노친네, 간밤에 어찌 놀랐는지, 아침 잠 
없는 양반이 내처 눈을 못 뜨네. 왜 나이 들면서 안하던 짓을 해. 술을 안 먹나, 
애들을 안 패나. 정신 없는 노친네한테 미친 사람처럼 성을 안 내나. 
오늘은 연수도 먼저 가고 택시 타요" 
정박사는 아내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 오후에 장박사 병원으로 좀 와." 
"뭐한다구요?" 
정박사는 여전히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신발을 신으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검사 한두 가지 더 할 게 있어." 
"어제 다 했잖아? 종합병원까지 가서 할 검사 뭐 있어? 기껏 오줌소태 
가지구. 대충 약이나 주면 되지. 암튼 의사들이란 그저 환자만 보면 난리지." 
"뭘 그렇게 잘 알아?" 
아침부터 심사가 곱지 않았던 아내가 툴툴거리자 정박사가 버럭 화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서슬에 잠시 가기 꺾인 인희씨는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성질만 낼 게 아니라, 오늘 나 일산 간다니까? 돈을 갖다 줘야 일을 하고, 
그래야 춥기 전에 들어가지. 이누무 집 위풍이 세서, 노인네 겨울만 되면 쿨룩이누만." 
눈치를 보아가며 말대꾸를 하던 인희씨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마저 이었다. 
" 근덕이네도 한번 가볼라고 하는데." 
자기 몸이 어떤 줄도 모르고 오지랖 넓게 할 일도 많은 여편네 보기가 
답답했던지, 정박사는 나가려다 말고 또 한번 버럭 성을 낸다. 
"잔말 말고 와!" 
"안 가도 될 걸." 
"당신이 의사야?" 
정박사가 화난 얼굴을 더욱 구기며 마당으로 나갔다. 
간밤 죽을 병 어쩌구 했던 말을 다 취중객설이려니 흘려 넘겼던 인희씨로선 
남편의 그런 태도가 영 야속하기만 하다. 
"알았어요, 가요." 
곧이어 남편이 대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 모습을 감추자 인희씨는 분풀이라도 
하듯 그 뒤에 대고 눈을 흘겼다. 
"늙어서 꽥꽥대면 무섭기나 하간? 잘 가라, 이 영감태기야!" 
혼잣말이라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니 여간 통쾌한 게 아니었다. 노망든 
시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어제부터 까닭 없이 심통을 부리는 남편 때문에 속이 
잔뜩 상한 데다가 간밤엔 괜히 속 답답한 잡념이 하도 많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붙이라고 하나 있는 게 툭하면 속을 썩이는 남동생 근덕이다. 근덕은 어릴 
때는 심약해 터져서 걱정이더니 나이 들수록 거꾸로 행실이 사나와져 내처 
걱정이었다. 근덕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억장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근덕이 어릴 때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남매는 줄곧 아버지 손에서 컸다. 
성격이 완고하고 매사에 엄격하셨던 친정 아버지 밑에서 자랄 때만 해도 근덕은 
그런 대로 비뚤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달랑 남매 둘이서 홀아비 
손에 크다 보니 근덕은 늘 심리적으로는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본성은 
그런대로 착한 아이였다. 매사에 끈기가 부족하여 악착같이 생활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도 다 그 착하기만 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업이 기울기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제 먹고 살 궁리만 
해주면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람의 일인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험한 꼴까지 보게 되었는지.' 
인희씨는 근덕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 게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어제 일만 해도 그렇다. 얼마 전에 찾아와 어떻게 해서든 맘잡고 
살아보겠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기어이 일을 저지른 눈치가 뻔했다. 
그 동안 툭하면 손 벌리는 통에 갖다 준 돈만도 얼만지 모른다.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목돈이라도 만들어 주면 며칠 못가 노름으로 날리고 술값으로 
날리는 통에 이제는 제 자형한테도 눈밖에 난 처지다. 남편 병원이라도 잘 될 
땐 그런 돈도 표가 안 났지만 이제는 푼돈 쪼개 주는 것만도 벅찬 형편이 돼 버렸다. 
찾아왔을 때 중고차라도 한 대 산다기에 겨우겨우 돈 이백만원 쥐어 줬는데, 
그러고 난 지 열흘도 못 돼서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밑빠진 독에 물 
붓기도 정도가 있는 것이고, 누나로선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일산 집 짓는 데도 가봐야 하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병원에선 웬 
검사를 그렇게 숱하게 받으라는 건지. 어제 오후 내내 남편 병원에서 
검사받으라 지친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운이 다 빠지는데. 빨리 
약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오줌소태는 갈수록 심해져 어제 오늘 소변 한 번 본 기억이 없다. 
"어째 요즘은 심란한 일투성이래." 
찬거리를 잔뜩 싸들고 봉천동 언덕빼기를 끙끙대며 오르는 인희씨의 이마에 
십일월인데도 불구하고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이윽고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가옥 철대문을 열자 어제의 난동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돗가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다. 깨진 연탄재며 찌그러진 양은 그릇, 못 
쓰게 된 야채와 안줏거리들이 서로 뭉치고 섞여 엉망이었다. 
"올케." 
인희씨는 그걸 보자 또 가슴이 철렁해져서 안에 대고 조심스레 근덕댁을  불렀다. 
"누구세요?" 
곧이어 부엌에서 머리를 감다 말고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힌 채 근덕댁이 뛰쳐나왔다. 
"어머, 형님! 어쩐 일이세요?" 
호들갑을 떨며 뛰쳐나온 근덕댁은 얼른 머리를 헹구고 나와 난장판이 돼 버린 
수돗가를 치운다, 방을 정리한다 하며 한동안 수선을 피웠다. 
"인희씨는 그 동안 마루 끝에 앉아 심란스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젠 장사두 못 나갔겠네." 
"괜찮아요. 오늘은 나갈 거^36^예요. 얼마 안 들고 나갔으니까, 그이두 곧 
들어올 거예요. 그놈의 도박. 형님한테 이런 꼴 안 보이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남들처럼 배운 건 없어도 심성 하나만큼은 착하고 너그러운 올케는 시누이 
대하기가 민망한지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런 올케가 기특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짜안하게 마음이 저려왔다. 
"올케가 죄송할 게 뭐 있어? 그 자식이 미친놈이지." 
인희씨는 지갑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올케한테 내밀었다. 
"얼마 안 돼. 내가 찬값 모은 거야." 
"괜찮은데." 
"받아 둬. 피붙이라고 이거밖에 못하네." 
"많이 도와 주셨어요. 전 염치가 없어 고개도 못 들어요." 
서로 미안해 하고 안쓰러워 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두 여자의 맞잡은 
손으로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 호젓한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핏줄 같은 정이 둘 사이를 진하게 당겨 주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근덕댁이 대뜸 고개를 들며 물었다. 
"형님, 점심 하실래요?" 
문득 시장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올케 먹어, 난 그냥 먹는 거 보구 갈게." 
"왜요? 같이 드시지." 
한사코 밥상을 차리겠다는 걸 병원에 빈속으로 가야 한다며 사양했더니, 
근덕댁은 대충 양푼에 밥을 비벼 마루로 가져왔다. 꼴을 보니 속이 상해서 아침도 굶은 기색이었다. 
고추장을 듬뿍 넣어 비빈 밥을 우걱우걱 퍼넣으며 혼자서도 먹성 좋게 밥을 
먹는 올케를 인희씨는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지난 번엔요, 조 아래 여관에 로타리카페 레지하고 찰싹 달라 붙어 있는 걸 
제가 뛰어들어서, 히히, 그년 젖통을 덥썩 물어 버렸어요. 그냥 그 인간 거시길 
물어 요절을 내려다가, 히히, 나중에라도 쓸 데가 있겠지 싶어 그건 관두구요." 
인희씨는 불현듯 젊은 올케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며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이 때 인희씨는 남편이 서울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 팔팔한 
강짜 한번 부려 볼 기회를 가져 보지 못했다. 시집이라고 오자마자 남편은 
공부하러 떠나고 홀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던 그 외롭고 고단한 나날들. 
남들이 신혼의 단꿈이라고 말하는 시기를 인희씨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곤 했었다. 단꿈은 고사하고라도 아이들 키우랴 살림하랴 밤마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고 자 본 기억이 없는 고된 시집살이였다. 그렇게 십수 년 
세월을 남편과 떨어져 살다 보니 이제 와 추억할 만한 애틋한 사연 같은 것도 만들지 못했다. 
그 쓸쓸한 미소 끝에 인희씨가 올케에게 물었다. 
"그놈이 가만 있어?" 
"웬걸요. 내 머리챌 잡구 미친개 뛰듯 길길이 뛰더라구요. 그래도 거긴 다시 안 가는 거 같아요." 
인희씨는 또 미안해진다. 근덕댁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속편하게도 말을 이었다. 
"도박한 건 그러구 나서니까, 얼마 안 됐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바로 그때 근덕이 초췌한 얼굴로 대문을 걷어차며 모습을 나타냈다. 
"밥 줘, 기집애야!"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신경질부터 버럭 내는 것도 근덕의 못된 버릇 중 
하나다. 그는 매사에 그렇듯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변한 것이다. 그 꼴을 보니 
인희씨는 한숨부터 나왔다. 근덕은 마침 제 누나가 와 있는 걸 보고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뭐하러 왔어, 여길?" 
밥을 입에 퍼넣다 말고 근덕댁이 움찔 놀랐다. 인희씨는 한심스런 눈으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의사 사모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냐구? 지질 궁상들 어떻게 사나  보러 왔어?" 
근덕은 제풀에 화가 나서 웃옷까지 벗어 던지며 이기죽거렸다. 보다 못한  인희씨가 한마디 했다.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일 한다고 돈 가져가 놓구, 뭐, 도박을 해?" 
그 말에 찔리는 게 있었던지 근덕은 눈을 부라리며 제 처를 노려보았다. 
"그, 그게 아니구." 
겁에 질린 근덕댁이 울상을 지었다. 
근덕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라는 듯 마구잡이로 나왔다. 
"그래! 도박했다, 왜? 차 한 대 사달라니까 기껏 돈 이백 주구, 지금 생색내는 
거야? 그 돈 갖곤 안 되겠어서 나 도박한다. 왜 떫어?" 
이젠 누나고 뭐고 볼장 다 본 것처럼 근덕은 침까지 퉤, 뱉아가며 대들었다. 
당황한 근덕댁이 마루에서 맨발로 뛰어내려왔다. 
"왜 그래요, 누님한테." 
"안 보구 살자며? 의 끊자며? 그래, 동생이 이렇게 사니까 맘이 꽤나 편해?" 
근덕은 아내의 만류에도 막무가내 였다. 그는 마당으로 쫓아내려와 잡고 
매달리는 아내를 거칠게 뿌리치며 옆에 있던 양은 대야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맘 편해? 잠이 잘 오냐구?" 
"그래, 이놈아. 마음 편히 잠 잘 잔다, 왜?" 
누나가 하도 속이 상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근덕은 더더욱 길길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잘 자라! 여긴 내 집이니까 나가! 어서 나가, 어서 안 나가?" 
근덕은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어 던지며 행패를 부렸다. 결국 인희씨는 
남동생한테 쫓겨나다시피 해서 그 집을 나섰다. 봉천동 산꼭대기 그 아득한 
골목길을 구비구비 돌아 내려오자니 참으려 해도 자꾸 눈물이 솟았다. 그래도 
한 가지에 나서 자란 핏줄인데, 핏줄인데. 인희씨는 근덕이 야속하여 
슬펐고,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여 또 슬펐다. 
그러자니 아래쪽에서 전과 다른 심한 통증이 일었다. 인희씨는 걷다가 몇 
번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식은땀이 흘러 오한이 나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겨우 버스 정류장 앞에 당도하여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아랫배의 통증을 참고 있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환자를 대하면서도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제 마누라는 그 지경이 되도록 손 한번 못 써준 주제에 무슨 의사라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나오는 건 쓴웃음뿐이었다. 정박사는 결국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가운을 벗어 던져 버렸다. 
"정박사님 안에 계시지?" 
"네." 
진료실 밖에서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윤박사의 음성이 들렸다. 곧이어 
그녀가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 
"장선배한테 사진 보냈어요." 
안 그래도 절친한 친구이자 암 치료의 권위자로 알려진 장박사한테 아내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박사는 짐짓 윤박사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누가 너한테 그러라 시키든?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해, 넌?" 
윤박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의 일이라면 때로 친누나도 
그렇게 못할 만큼 세심하게 배려해 줄 줄 아는 여자 후배한테 정박사는 지금 
공연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름대로 기껏 애를 쓰고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핀잔만 들은 윤박사는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박사는 말없이 양복 저고리를 몸에 걸쳤다. 
"검사 다시 받을 거야, 이 차트 필요 없어." 
윤박사는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속 깊은 
여자였다. 아무리 의사라는 직업이 냉철한 이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지만, 막상 
이런 경우를 당하고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윤박사가 
보기에 정박사는 지금 의사로서가 아닌, 절박한 환자의 가족된 입장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병원에 있지만, 난 이 병원 못 믿어. 지난 번 윤박사 환자도 자궁 
종양을 양성인데 악성으로 잘못 짚은 적 있지? 다시 감사할 거야. MRI 기계는 
초창기에 사서 너무 오래됐고. 아무튼 다, 싹 다 못 믿겠어." 
정박사는 실내화를 구두로 갈아 신으며 다 지난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지금 그가 말한 실수는 윤박사 스스로 곧바로 발견해서 바로잡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선 정박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박사를 그저 처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도 속으론 자신의 검사 결과가 오진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 간다." 
정박사는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장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종합병원으로 났다. 
종합병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입구를 뚫어져라 살피던 정박사는 이윽고 저만치서 잰걸음으로 
허둥지둥 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나쁜 놈." 
그녀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로 연신 군시렁거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성난 망아지 모양으로 날뛰며 폭언을 한 동생 때문에 아직도 
어지간히 속이 상한 표정이었다. 
"이 양반이 아직 안 왔나?" 
그녀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쭉 빼고 로비 안쪽을 기웃거린다. 
"왜 이렇게 늦어." 
정박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짜증을 냈다. 짜증이 나긴 인희씨도 
마찬가지여서 싫은 소리를 했다. 
"뭐 좋은 일이라구 서둘러요?" 
"가." 
이럴 때 남편이라도 좀 자상한 데가 있어서 신세 한탄이라도 받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짓이 타고난 목석이다. 
인희씨는 눈 한번 마주칠 새 없이 앞서 걷는 남편을 뒤따라가며 한껏 눈을 흘겼다. 
잠시 후, 정박사는 아내를 진료실에 들여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잘 안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라. 얼굴이 그게 뭐냐?" 
단둘이 있게 되자 장박사가 침착하게 충고를 해 왔다. 그러나 지금 
정박사에겐 친구의 충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검사 처음부터 다시 해 줘. 윤박사가 보낸 거 싹 다 잊어버리라구." 
장박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인희씨가 간호사와 함께 진찰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오늘 피를 한 말은 뽑네." 
"제수씨 힘들죠?" 
인희씨가 가볍게 농을 건네자 장박사는 친절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장박사와는 남편들끼리 워낙 가깝다 보니 안사람들하고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냥 난 약이나 주면 좋겠구만." 
"이쁘니까 잘 해주려고 그러지." 
"경환 엄만 잘 있죠?" 
"늙은이가 잘 있어 봤자지, 골골해요." 
그쪽도 무슨 병이 있나 싶어서 걱정스런 눈길로 반문하는 인희씨를 향해 
장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야 평생을 약으로 사는데, 뭐. 걱정할 거 없어요." 
"검사실이 이층인가?" 
정박사가 지금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장박사의 말꼬리를 잘랐다. 
사람 좋은 장박사는 정박사의 서두르는 모양이 안쓰러웠지만 짐짓 부드럽게 
웃으며 친구 부인을 바라보았다. 
"급하긴 빈 속이죠?" 
"예." 
"어제 검사에서 빠진 거랑, 또 어제 검사했어도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다시 할 거^36^예요." 
인희씨는 장박사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신중하게 듣고 있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기가 측은해져서 정박사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장박사가 다시 물었다. 
"소변 보기가 많이 불편해요?" 
" 그러네요." 
"얼마나?" 
"오늘은 배만 뒤틀리구,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정박사와 장박사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하는 
말대로라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정박사는 아내가 설마 그 정도 상태가 되도록 고통을 참고 있었을까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꾸 서두르기만 했다. 
"자, 빨리빨리 검사하자구." 
곧이어 내시경이며 MRI, 심전도 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내가 조금은 겁먹은 얼굴로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 동안에 정박사는 
장박사와 함께 이미 넘어온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박사가 먼저 정박사의 안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수술 못 해." 
"왜?" 
"알잖아." 
"내가 뭘 알아. 명의라고 소문난 너나 알지. 나 같은 돌팔이 의사가 뭘 알아. 
난 위염을 위궤양이라고 판정한 적도 있고, 맹장을 장염이라고 오진한 적도 있어. 난 몰라." 
정박사는 사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한사코 자조적인 심정이 되어 
친구 앞에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심기가 사나워진 까닭이었다. 
장박사는 그런 친구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냉철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했다. 
"너, 그런 행동 도움 안 돼." 
장박사의 어조에는 안타깝지만, 어느 정도의 비난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정박사가 차마 붉어지는 눈자위를 숨기지 못한 채 천천히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창피한 소리지만, 나 낼 모레면 아랫것들한테 밀려 삼십 년 의사직도 
그만이야. 그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나 지금 그만둔다. 나 지금부터 의사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알아듣게 찬찬히 설명해." 
"이미 늦었어." 
"그게 의사가 할 소리야, 임마! 니들은 남의 사정 생각두 않구, 늦었다 그 
한마디면 모든 게 끝나? 돈 뜯으려고 이 검사 저 검사 다 해놓구 늦었다, 
그러니 가라! 그럼 끝나는 거야? 사람 목숨 놓구 가라, 그럼 끝나는 거야, 이 자식아!" 
격분한 정박사의 눈가에 불꽃이 튄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무구 분개해서는 길길이 뛰었다. 
장박사는 친구의 그 대책 없는 분노 앞에서 씁쓸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화를 내고 말았다. 
"수술이 하등의 도움이 안 돼! 임파선이 퉁퉁 붓고, 여기저기 엉망이야. 잘못 
수술하다 더 크게 번질 수도 있어. 괜히 이곳저곳 휘저어 병만 키운다구. 진정해, 너 임마!" 
"수술해!" 
"안 돼!" 
기어이 눈가에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어쩌지도 못한 채 정박사가 장박사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수술해. 배 열어 보기 전엔 누구도 어쩌구저쩌구 장담 못 해. 너 왜 그렇게 
말이 쉬워? 남편이 의사란 작자가 손 하나 까딱 않고 저 하나만 보고 산 
여자한테 거두절미하고 너 끝장났어, 여편네야. 그렇게 말하라구? 난 못 해. 배 
열구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나 그 말 못 해. 진행이 예상보다 덜할 수도 있어.  아직은 그 여자두 안 아프대." 
정박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고 있었지만, 장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퍼. 참는 것뿐이야. 분명 아퍼. 그리고 수술하면 인희씨가 더 힘들어. 캔서 
환자 더디 아무는 거 너두 알잖아?" 
그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박사는 지금 하다못해 천만 분의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모든 걸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장박사는 그 천만 분의 일만큼의 가능성조차 부인하고 있다. 
그는 장박사의 무섭도록 차분한 태도에 한 말을 잃은 듯 잠자코 뷰박스를 
다시 켜 보았다. 푸르스름한 불빛 위에 역시 종양 덩어리가 확실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이내 모든 걸 체념한 듯 맥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두 의사야. 이게, 이렇게 큰 게 아래를 누르고 있어. 소변 볼 때마다 
죽을 맛일 테구. 하루가 다르게 더 심할 거야. 자각은 죽는다는 통보니까 곧 죽겠지." 
잠시 울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고 참던 정박사가 이윽고 필름을 두드리며 
장박사에게 사정조로 말을 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건 떼낼 수 있어. 숨통이나 틔워 주자구! 단 일주일이라도 더. 그것만이라두 해주자구!" 
아무리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을 지닌 장박사라 할지라도 친구의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친구를 설득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장박사는 잠시 고민하다, 마침내 가망도 
없는 수술에 동의하고 말았다. 
정박사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장박사를 바라보았다. 
"내일 3시, 틀림없지?" 
"그래, 내일 당장 입원시켜." 
"갈게." 
정박사는 장박사의 확답을 받고 난 뒤에도 몇 번씩이나 수술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찰실을 나왔다. 
자신의 몸 속에 그렇듯 심각한 병마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인희씨는 그저 새로 짓고 있는 집 걱정뿐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박사와 인희씨는 대판 말씨름을 벌여야 했다. 
집으로 가자는 정박사의 말을 무시하고 인희씨가 한사코 일산행을 고집하는 
바람에 서로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집은 나중에 지어두 돼. 아픈 사람이 어딜 가!" 
설득하다 지친 정박사가 짜증을 내자, 인희씨는 또 나름대로 화가 나서 
무작정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프긴 누가 아퍼? 하긴 내 나이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하대?" 
사람이 몰라도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하태평인 아내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정박사가 성큼성큼 뒤따라가서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만큼은 인희씨도 막무가내였다. 
"집에 큰돈 두구 잠이 와요? 그리구 몇 번 말해. 노친네 겨울나기 힘들어, 곧 들어갔으면 싶다구." 
정박사는 짜증스럽게 팔을 뿌리치며 고집을 피우는 아내를 향해 분통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다시 팔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구." 
"진작에 좀 걱정하지?" 
갑자기 인희씨가 팔을 홱 뿌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말이 
탁 막혀 버린 남편을 탓하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젊어서 애 날 때두 옆에 없던 사람이 늙어서 망령이 나나. 가요, 일두 안 하구 월급 받으려나." 
정박사는 매몰차게 쏘아붙인 뒤 정류장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내를 
멍하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무슨 원망을 듣는다 해도 할 말이 
없어서였다. 그러면서도 정박사는 다시 후다닥 뒤따라가 아내의 팔을 붙잡아 
보았다. 그러나 남편 속도 모르고 인희씨는 한사코 뿌리치기만 했다. 
"내 걱정 그리 돼면, 근덕이한테나 한번 가보슈." 
그녀는 갑자기 야속한 듯 덧붙였다. 
"그러는 거 아니우.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구, 당신한텐 하나밖에 없는 처남인데." 
난데없이 골칫덩이 처남을 들먹이며 자신을 탓하는 아내가 못 마땅하긴 
했지만 정박사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술 먹지 마요." 
이윽고 만류하던 남편이 포기할 기미를 보이자 일산행 좌석버스에 올라타려던 
인희씨가 혼잣말처럼 덧대었다. 
"어젯밤처럼만 왔단 봐라!" 
버스가 떠났다. 
정박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로 일산행 버스가 떠난 쪽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병원에선 젊은 원장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펄펄 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정박사가 일찍 퇴근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병원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박사 친구가 원장 자리에 있던 
곳이다.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경영주가 바뀌는 바람에 이즈음엔 
난데없이 나이든 의사들이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렇잖아도 요즘 새파란 
신출내기 원장이 이전부터 그 젊은 원장한테 미운털이 박힌 신세였다. 
"정박사님 대체 왜 그러신답니까?" 
퇴근 무렵 윤박사의 진찰실로 찾아온 원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젊은 원장이 물갈이 리스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병원 내 몇몇 나이든 의사가 그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년이 겨우 일 년 남짓 남겨 두고 있는 
정박사가 그 명단의 맨 위칸을 차지하고 있으리란 것쯤은 웬만한 간호사들도 다 
알고 있었다. 원장은 윤박사가 정박사와 절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험담을 입에 담았다. 
"병원을 말아먹으려고 하는 건지, 예약 환자도 몇 안 되는 양반이 환자를 다 
돌려보내고 자긴 벌써 퇴근을 해 버려? 일 못시켜 먹겠네, 정말!" 
어차피 병원도 돈 벌려고 하는 사업인 바에야 의사는 예약 환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똑같은 환자라도 진료비를 되도록 많이 받아내야 한다는 
게 젊은 원장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그게 곧 그의 경영철학이기도 했다. 그 
동안, 그런 개나 물어갈 개똥 철학 따위로 의사의 능력을 가늠하는 젊은 원장의 
뻔한 장삿속에 정박사는 누구보다도 강한 불만을 표시해 왔다. 원장의 눈에 
그런 정박사의 태도가 곱게 비쳤을 리가 없었다. 그는 틈만 나면 매상이나 
올리라고 독촉하는 포주처럼 정박사를 닦달하려 들었고, 정박사는 그런 원장을 
아^36^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원장과 정박사는 아예 완전히 서로 다른 
색깔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무엇 하나 눈에 차는 게 있을 리 
만무였다. 그러던 차에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고, 이런 일까지 있고 
보니 원장이 길길이 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원장은 괜하게 윤박사에게 화풀이를 좀더 하고는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윤박사는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윽고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윤박사가 막 퇴근을 하려고 일어설 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박사가 문을 빼꼼 열었다. 
"윤아, 술 한잔할래?" 
윤박사는 잠시 전의 심란한 표정을 거두고 엷게 웃어 보였다. 
"사줄실 거예요?" 
"비싼 건 못 사구, 포장마차에서 간단하게 한잔 사지." 
"그러죠, 뭐." 
윤박사는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곧 병원을 빠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둘이 함께 술을 마시러 간 곳은 다름아닌 근덕댁의 포장마차였다. 
포장마차는 마침 저녁 시간이라 비교적 붐비는 편이었다. 근덕댁은 혼자 
부지런히 안줏감을 만들어 내고, 또 한편으론 국수를 말아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윤박사를 앞세우고 들어서는 정박사를 보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 처남댁한테 부탁이 있어 왔어요." 
한차례 몰렸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 나가고 처남댁 일손이 조금 한산해진 참이었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정박사가 처남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같은 거한테 무슨." 
손위 시누이 남편 대하기가 어려워 몸둘 바를 모르던 근덕댁은 겨우 웃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정박사가 정중하게 덧붙였다. 
"우리 마누라 수술 들어가는데, 병간호 좀 도와 줘요. 워낙 깔끔한 사람이라 
남의 손 빌리는 거 싫어할 것 같아서 그런데." 
뜻밖에 수술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윤박사가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정박사는 의식적으로 그 시선을 묵살하며 빈 술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그 바람에 더욱 놀란 건 근덕댁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쪼그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형님 어디 아프세요? 어, 오늘 낮에까지만 해두 별일 없었는데." 
정박사는 말없이 처남댁을 쳐다보았다. 그 눈치를 지레 살펴가며 근덕댁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연히 시누이한테 돈 받은 
일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저, 그러니까 오늘 낮에 김치랑, 아니 젓갈이랑." 
"알아요. 얘기 들었어요." 
" 네, 그러셨구나. 정말 젓갈밖에 안 주셨어요." 
없는 주변머리에 변명을 늘어놓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는 처남댁이 안쓰러워 
정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아내가 간간이 처남네 옹색한 살림에 돈을 
보태 주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그걸 끝까지 모른 척하지 못하고 
언젠가 아내한테 싫은 소리를 좀 한 뒤부터는 아내고 처남댁도 서로 쉬쉬하는 눈치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망나니 같은 처남 뒤나 돌봐 줄 작정이냐고 아내를 
몰아붙였던 일이 새삼 가슴에 밟혔다. 비록 지난 일일 망정 여린 아내가 어찌 
생각했을까 헤아려 보면, 자신이 한없이 치졸하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윤박사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박사는 그런 윤박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사이 처남댁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근데 어디가 많이 아프세요?" 
"." 
"어디 가요? 형님 오줌 오줌소태 때문에 고생이라시던데, 오줌보가 문젠가?" 
"네, 그렇네요. 드럽게 오줌보가 안 좋네요." 
정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박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랑 나가서 얘기 좀 해요." 
정박사는 윤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분명 수술에 기대를 거는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싶을 터였다. 
그는 조용히 윤박사의 팔을 잡아 앉히며 처남댁에게 재차 다짐을 두었다. 
"해줄 수 있죠? 낼 당장 입원할 건데." 
"그럼요." 
처남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선히 응해 주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마음이 급한지 두르고 있던 앞치마부터 벗었다. 
"그럼, 지금 당장 포장 접어야겠네요." 
"처남한테 얘기 안 해도 돼요?" 
그 물음에 처남댁이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정박사를 바라보았다. 남편에겐 
아무 기대도 갖지 않기로 한 한 여자의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마 한동안 안 들어올 거예요. 통장이 든 전대를 통째로 들구 나갔으니까 달포는 족히 걸릴 걸요?" 
"여전히 속썩여요? 나쁘네." 
"아녜요. 그렇게 안 나뻐요. 애 못 낳는 년, 데리고 사는 것두 고맙죠, 뭐." 
어쨌거나 남편이라고 도리질까지 해가며 감싸고 도는 처남댁의 티없는 
마음씨가 안쓰럽기만 하다. 다소 수다스런 구석은 있지만 언제 봐도 처남댁에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장점이자 약점인 그 
무구한 천진성에서 비롯된 편안함일 터였다. 
"저 그럼, 지금 집에 갔다 오실래요? 짐두 좀 챙기시구, 처남한테 메모두 남기고. 여긴 내가 지켜 드릴게." 
"그러실래요?" 
"정선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박사가 만류하고 싶은 심정으로 끼여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서둘러 포장마차를 나서는 처남댁을 눈으로 배웅하고는 묵묵히 또 한 잔의 술을 비웠다. 
옷 보따리도 챙겨가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근덕댁은 한길가에 있는 카페 앞을 
지나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남편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덕은 이 카페 여종업원과 죽고 못사는 사이였다. 
그녀는 허름한 카페의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마다 칸막이가 
쳐진 으슥한 모양새가 마치 더러운 매음굴 같았다.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한 실내에 뿌연 담배 연기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 
매달린 조잡한 조명이 빙빙 돌아가며 칙칙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칸막이 룸 안에서 귀에 거슬리는 껌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 안은 
음악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다. 분명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룸에서는 무슨 
짓들을 하는지 말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인기척을 듣고 룸 밖으로 나온 여종업원이 근덕댁을 보고는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둘은 서로 좋지 못한 사건으로 벌써 안면을 익힌 터였다. 
근덕댁은 상대방의 얄궂은 옷차림부터가 눈꼴사나웠다. 도대체 옷을 입은 
건지, 몸에 갖다 붙인 건지 구분이 안 가는 행색을 하고 여자는 짜증스레 자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뭐하러 왔어?" 
먼저 기가 꺾일세라 야멸찬 기색으로 노려보고 서 있는 근덕댁을 향해 카페 
여자가 이기죽거렸다. 그녀는 제 젖가슴을 쓱쓱 문질러대며 생각할수록 약이 
오른다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냈다. 
"개 같은 년! 또 물러 왔니, 응? 왜 왔어?" 
별 꼴같지 않은 게 성질을 다 낸다 싶어서 근덕댁은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남편과의 일을 생각하면 상대방이 도리어 화를 내는 게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을 사람부터 찾아보자 싶었다. 
"우리 집 인간 안 왔어?" 
"안 왔다." 
"정말?" 
제딴엔 태연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자신을 내쫓지 못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영 자연스럽지가 못한 
것이다. 성깔깨나 있는 년이 어째 켕기는 데가 있어 저러지 싶어 근덕댁은 
용기를 내서 칸막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페 여자가 앞을 가로막아서며 
일부러 안에 들리도록 비아냥거렸다. 
"나 새서방 만났어. 경고하는데, 곱게 가 줄래 불독 아줌마? 나 아주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 말에 응원이라도 하듯 안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뭐해? 빨리 들어와!" 
정말 저 남자가 이 여우 같은 것의 새서방인가 싶어 쳐다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안에서 여러 명이 노름판을 벌이는 것만은 확실한데, 무작정 커튼을 
들춰 볼 만한 배짱도 없다. 
근덕댁은 남편 신발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몸을 숙여 안쪽을 테이블 밑을 
훑어보았다. 컴컴한 불빛 아래라 잘 확인할 순 없었지만 느낌은 영 찜찜하기만 했다. 
그녀의 자신 없는 태도에 카페 여자가 사뭇 의기양양해져서 이기죽거렸다. 
"어서 꺼지셔. 이번엔 내가 물기 전에." 
근덕댁은 할 수 없이 뒤돌아 나오면서 카페 여자를 매섭게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지조 없는 년!" 
근덕댁은 저런 바람둥이 생날라리 같은 걸 좋다고 따라다닌 남편이 
한심스럽다기보다는, 이상하게도 그런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 차 버렸다는 그 
카페 여자한테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 안에서는 근덕이 의자 위에 쪼그린 자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카드 패를 펼쳤다. 오늘은 운이 
좋으려는지 돌리는 판마다 돈이 붙는다. 
"야, 너 제법이더라!" 
근덕은 무사히 아내를 따돌리고 들어온 카페 여자를 끌어안고 모처럼 쾌재를 불렀다. 
처남댁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윤박사와 술잔을 주고받던 정박사는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언니가 힘들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할 말을 잔뜩 쌓아 두고 있던 윤박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소주잔을 털어넣었다. 
"할 수 없지. 너두 좀 도와라." 
"." 
"해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거 같아." 
" 네." 
" 남자가 참 그렇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윤박사는 정박사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가운데, 그가 뜬금없이 하던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봐라. 남자란 인간이 참 쓸모가 없어. 젊어 일할 때나 쓸모 있을까, 
늙어지면 쓰레기야. 평생 지 한 몸 간수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구 살고. 도대체 
하는 게 없어. 밥을 할 줄 아나, 빨래를 할 줄 아나, 애들을 키울 줄 아나." 
정박사의 자조 섞인 넋두리는 곧 쓸쓸한 농담으로 바뀌었다. 
"집사람 죽는다고 슬픈 건 없는데, 참 아쉬울 거는 같네." 
"." 
"난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날 거다. 된장 담그는 것두 배우고, 김치 담그는 
것두 배우고. 우리 집사람 반찬 아니면 어디 가서두 수저를 못 드는데 
아무래도 나두 곧 굶어줄을 것 같다." 
윤박사가 그 한마디 한마디를 아프게 경청하고 있는 사이 잠시 끊어졌던 
정박사의 말이 한숨과 함께 이어졌다. 
"윤아, 너두 우리 집 된장, 고추장 많이 퍼다 먹었지?" 
" 네." 
"너 이제 그 된장 못 먹게 돼, 어쩌냐? 안됐다." 
윤박사는 고개를 숙인 채 소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농담을 하는 양 
말하고 있었지만 어느 곁에 정박사의 목소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하르르 
떨리고 있었다. 윤박사는 거기다 대고 뭐라 뒤를 달 수가 없었다. 무언가 
목구멍에서 말을 막고 있는 듯하여 윤박사는 괜히 만지작거리던 소주잔을 입안에 쏟아부었다. 
그 참에 집에서는 간병인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인희씨가 집을 
비운 사이 낮잠에서 깨어난 상주댁이 또 정신이 흐려진 것이다. 
대여섯 시간을 곤히 자다 깨어난 상주댁은 주방에 웬 낯선 여자가 있는 걸 
보고는 다듬이 방망이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낯선 간병인이 전기밥솥을 여는 모습을 보고는 필시 도둑인 줄로만 여긴 
것이다. 전에 수십 번을 보아온 간병인이라 해도 한 번 정신이 깜빡 넘어가면 생판 낯선 남이었다. 
간병인은 그때 마침 밥을 푸며 무선전화기로 인희씨와 통화중이었다. 그 참에 
살금살금 다가온 상주댁은 방망이를 들어 간병인을 냅다 후려쳤다. 
"아이쿠!" 
통화를 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는 간병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도둑이다!" 
이어 시어머니의 외침 소리도 선명히 들려왔다. 
"아줌마?" 
인희씨는 덜컥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에 대고 간병인을 소리쳐 불러 
봤지만 들려오는 건 시어머니의 옹골찬 음성뿐이었다. 
"너, 도둑년이지? 내가 니 년을 반드시 서에 넘길 거야. 콩밥을 먹일 거야, 이년! 수갑을 채울 거야!" 
"아이구, 그놈의 몽둥이 좀 치워요. 진지 드릴게." 
"뭐? 내 밥까지 도둑질 해!" 
간병인이 방에 갇힌 모양이었다. 몽둥이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시어머니의 고함과 간병인의 비명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수화기 저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 빨리 가 주세요." 
집을 떠나 한시도 마음이 편할 리 없던 인희씨는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으로선 당장 집으로, 시어머니 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영 마음이 개운치 않더니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인희씨는 집이 가까워져 오는 동안에도 몇 번씩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현장 소장이 일산에서 집까지 태워다 준 덕분에 돌아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나 왔어." 
이윽고 숨을 헉헉대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 인희씨는 다른 건 볼 것 없이 
시어머니 안부부터 확인하였다. 거실에 들어섰을 땐 간병인이 근 한 시간 가까이 욕실에 갇혀 있던 중이었다. 
"어머니, 이제 괜찮아, 괜찮아." 
인희씨는 겁먹은 얼굴로 거실에서 밥솥을 끌어안고 있는 시어머니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어서 곧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어 주자 간병인이 뚱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간병인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상주댁은 애처로운 음성으로 며느리한테 응석을 부린다. 
"어디 갔다 왔어?" 
영락없이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의 눈매였다. 인희씨는 그 측은한 눈길을 바라보며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집 보구 왔지!" 
상주댁은 입가에 김치국물이며 밥알 찌꺼기를 잔뜩 묻힌 채 히죽 웃었다. 그 눈가에 그렁그렁 물기가 서렸다. 


퇴근 무렵, 연수는 결국 인철과 크게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연수는 그것이 인철의 부질없는 집착탓이라 생각해 버렸다. 
연수는 이따금 그가 자신과 영석의 관계를 신문하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지난 번 영석의 일로 
마음 고생이 심할 때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뒤부터는 더욱 노골적인 비난의 
시선을 던지곤 했다. 지금 와선 그 일이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땐, 
인철의 위안이 큰 힘이 됐던 게 사실이긴 했다. 
어쨌거나 경솔한 행동이었어. 그가 대학 때부터 자신을 향해 특별한 
감정을 가져왔다는 걸 알면서도 때마다 이기적으로 처신하여 결국 틈을 주고 
말았다는 게 연수로선 부정할 수 없는 실수였다. 
"저녁 같이 하자." 
"약속 있어요." 
모처럼 인철이 어렵게 제의한 저녁 식사를 한마디로 거절해야 했던 이유는 
물론 영석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수는 약속 상대가 차부장이냐고 
인철이 물어왔을 때, 굳이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일말의 떳떳치 못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인철은 그 틈을 잔인하게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사람이 이번엔 널 책임져 준대? 그러더냐구?" 
"책임져 주기 바라지 않아요." 
"사랑은 책임이야." 
"선배 생각이에요. 우린 아니에요." 
연수는 주차장까지 따라와 자신을 설득하려는 인철을 매몰차게 외면해 버리고 
차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는 차 문을 도로 열며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구 쏘아붙였다. 
"사랑은 책임이야. 적어도 책임지려고 하는 노력이야. 그게 사랑인 거야. 책임 
없는 사랑은 가벼워서 봄바람에도 날아가 바람 되고, 먼지 돼. 넌 먼지 되고 
바람 될 거야. 흔적도 없이, 그렇게 될 거야. 그 사람은 엄청난 책임과 무게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갈거구." 
"바람 되고, 먼지 돼도 난 좋아요. 추억은 있으니까." 
그 어떤 말을 해도 결국 구차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연수는 아등바등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아주 고통스럽게 의식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은 헤어 나오기 싫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미망이 그 고통을 다소나마 무디게 만들었다. 
인철은 그 미망을 깨뜨리기라도 할 듯 더더욱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똑똑히 들어. 차부장한테 넌 추억도 못 돼. 넌, 그냥 스쳐지나가는 
지나가선 다시 오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야." 
기어이 그 말이 나오고 말았다. 
연수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 
그녀는 침착하게,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인철의 충고를 묵살해 버렸다. 
"그렇게 쉽지 않아요." 
" 무슨 일 있었니?" 
인철의 당황한 눈빛. 연수는 그 불온한 우려가 무얼 뜻하는지 안다. 그녀는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떨며 인철을 노려보았다. 
"무슨 상상해요, 지금?" 
"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가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미안해요. 난 그 끝, 선배가 말하는 그 끝이라는 거 관심 없어요." 
인철의 표정이 점차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다. 
연수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비애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그런 감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인철은 굳은 듯 그 자리에 섰고, 연수는 모질게 
차 문을 닫아 버렸다. 곧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통해 점점 
작아지고 있는 인철의 모습이 왠지 연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영석을 태우고 그의 아파트 단지 앞에까지 왔을 때, 연수는 저 불빛 어딘가에 
섞여 있을 그의 방을 막연하게 그려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호주 친정집에 
다니러 간 영석의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혼자 있기 적절할 텐데, 그보다는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텐데,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조금은 처량하다고 느꼈을 때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 집 한번 들어갔다 갈래?" 
순간 연수는 그 말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이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듯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나 사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하긴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긴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 진열대 위에 놓인 그의 가족사진들이 연수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사한 웃음들, 그 어디에도 잠시나마 불행했던 그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연수는 그 중에서도 손대면 함박웃음이 담뿍 묻어날 것 같은 모습으로 영석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아내의 행복한 표정에 오래도록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던 영석이 거실로 나왔다. 
후드가 달린 흰색 면 소재의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렇게 차려 입으니 한결 
앳된 모습이었다. 꼭 소년 같아 보였다. 
"운동복도 잘 어울린다." 
영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땀 냄새가 나서 씻어야겠어. 냉장고 
열면 먹을 게 있을 텐데. 갖다 먹어. 곧 나올게." 
그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연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눈에 밟히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도로 냉장고 문을 닫고 
거기 붙어 있는 쪽지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아침 밥 꼭 먹을 것!' 
그의 아내가 써놓은 메모였다. 꽃무늬가 새겨진 예쁜 색지에 꼼꼼한 필체로 
써 내려간 글씨 아래 핑크빛 하트가 그려져 있다. 
연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 주스병을 꺼냈다. 그런데 
컵을 가지러 싱크대 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중 불현듯 묘한 혼란에 빠져드는 걸  느꼈다. 
* 전기밥솥 사용법 
(1) 쌀을 씻어 가운뎃손가락 둘째 마디까지 물을 붓는다. 
(2) 코드를 꼽는다. 
(3) 빨간 불이 들어왔나 확인한다. 
(4) 김이 나고 스위치가 보온으로 가면 밥이 다 됐다는 표시. 
(5) 귀찮다고 밥을 한꺼번에 많이 하지 말고 꼭 계량컵으로 두개씩만 하세요! 
(그 정도면 한 사람 정도 같이 먹을 수도 있음.) 
* 북어국 끊이는 법 
(1) 북어를 깨끗한 물에 10분 정도 불린다. 
(2) 식용유에 살짝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이면 좋지만, 귀찮을 땐 그냥 끓여도 
무방. 
(3) 국이 끓으면 조선간장을 한 숟갈 넣고 파, 계란을 풀어 넣는다. 
(4) 조미료 몸에 해로운 것 아시죠? 
싱크대 서랍과 식탁 여기저기, 하다못해 가스레인지에까지 온갖 조리법이며 
기구 사용법들이 적혀 있는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연수는 왠지 그 메모들이 자신을 주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지럽다. 거실 저쪽 사진 속에서 그 아내의 웃는 얼굴이 조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구원을 청하는 심정으로 바라본 욕실 쪽에선 요란한 물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어느 한 군데 연수가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사진 속의 그 여자는 
철저하게 집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수야, 미안한데 안방 장롱에서 수건 좀 갖다 줄래?" 
욕실의 물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영석의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수는 힘없이 결음을 옮겨 안방 문을 열었다. 침실, 그들만의 성역. 안주인의 
의심할 나위 없는 행복이 새록새록 넘쳐나는 방안 분위기. 깨끗하게 정돈된 
더블 침대. 그 머리맡에 나란히 놓인 베개 두 개. 그곳에도 복병처럼 진을 치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 
연수는 순간 자신이 절대 와서는 안 될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 죄책감 한편에는 모멸감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맞아, 수건 때문이야. 그는 지금 샤워 중이고 수건은 안방에 있어.' 
그녀는 애써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며 황망한 손길로 장롱 문을 열었다. 잘 
정돈된 모양으로 양복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깨끗하게 다림질한 
와이셔츠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연수는 이어 아래 서랍을 열어 본다. 눈부시도록 희게 손질한 그의 속옷과 
양말들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접혀 빼곡하니 들어차 있다. 수건은 맨 아랫서랍에 
색색깔로 구색을 맞추어 쓰기 쉽도록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연수는 그 중 하나를 꺼내 들고 장롱 문을 닫으려다 문득 문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매듭이 
지어진 넥타이가 분위기에 따라 일곱 개쯤 걸려 있다. 
사진 속의 여자는 그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집 안 곳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여전히 영석의 아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아침이면 남편을 위해 찌개를 끓이고 셔츠를 다렸을 그녀의 기꺼운 표정이 저 
사진 속에 있었다. 그를 위해 양말 한 짝, 손수건 한 장 준비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역할이란 게 한낱 보잘것 없는 배경 인물에 불과하리라는 쓸쓸한 자각. 
부인이 없는 동안 연수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같이 차 
마시고, 같이 식당에 가 준 일 정도였다. 그 일은 부인이 아닌 그 어떤 상대라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집 안에서 배어 나오는 아기자기한 살림 냄새는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 여자만의 절대 영역이다. 
연수는 지금 사진 속 여자를 바라보며 질투와는 다른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침대맡의 그 여자는 옛날 흑백사진 속의 어머니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혼란에 빠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수는 조용히 안방문을 열고 나왔다. 욕실에선 사뭇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저 휘파람 소리도 내 것은 아닐 테지. 연수는 가만히 욕실 앞으로 
다가가 수건을 내려놓은 뒤 현관문을 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을 한다고 했던가. 그들은, 서로 얼마나 사랑했기에 결혼을 했던 것일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청혼을 할 때 영석은 어떤 눈빛으로, 어느 정도의 절실함 
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까. 그럴 때 그녀의 표정은 어땠을까. 사진 속의 
미소처럼 수줍고, 고운 웃음 지었을까.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상대가 영석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였다면 같은 여자로서도 
기어이 반해 버렸을 그녀의 기품 있는 미소를 떠올리며 연수는 힘없이 벨을 눌렀다. 
"어떻게 모두 남의 일 같어? 지금이 몇 시야? 일찍 들어오라구, 내가 몇 번이나 일렀어, 도대체!" 
인희씨는 문을 열어 주며 버럭 짜증을 냈다. 낮에 시어머니가 간병인과 
한바탕 난리를 쳐 그렇잖아도 심란한데, 오늘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늦게 
들어온 식구들 때문에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래, 정말. 정신 빠진 노친네 가둬 놓구 맘이 편해?" 
"미안해요." 
인희씨는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에 마룻바닥을 걸레로 박박 문질러대며 딸의 
얼굴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정수는 벌써 이층 제 방에서 곯아떨어졌고 , 연수가 
들어오기 직전에 처남댁을 앞세워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정박사는 안방에 있었다. 
연수는 주방에서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는 근덕댁을 흘깃 보며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나 죽어두 눈 하나 꿈쩍 안 할 인간들." 
근덕댁은 시누이가 화를 내는 게 자기 탓이라도 되는 듯 이래저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정박사가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다. 자기가 곧 
어찌될 줄도 모르고 그 밤에 걸레질이나 해대는 아내를 대하자 정박사는 속내가 
뒤틀렸다. 늘 당연한 것으로 보아 오던 아내의 노동이 이제는 아프게 눈에 걸리는 것이다. 
"청소기 없어?" 
"그걸로 때가 져요?" 
여전히 걸레질을 해대며 짜증을 내는 인희씨를 연수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순 정박사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연수 니가 좀 해라!" 
"놔 둬요. 걔가 손모가지에 힘이나 있수?" 
연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인희씨가 입을 열었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연수 시켜!"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박사는 신경질적으로 아내가 들고 있던 걸레를 나꿔채서는 연수 앞으로  던져 버렸다. 
"임마, 니가 좀 해라!" 
연수는 기가 막힌지 그대로 선 채 정박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연수보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인희씨였다. 
"이 양반이." 
정박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제가 할게요." 
정박사는 재빨리 달려와 걸레를 집어드는 처남댁을 단호하게 저지하며 계속해서 딸을 몰아붙였다. 
"너 왜 안 해, 임마? 아버지 말이 말 같지 않아?"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연수의 표정이 점점 정박사를 경멸하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정박사를 향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어제 오늘 정말 왜 그러세요? 저두 힘들어요." 
연수는 왜 갑자기 아버지가 불 같이 화를 내는지, 그리고 그 화살이 어째서 
자신에게로 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박사는 그럴수록 격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뭐 힘들어? 니가 뭐가 힘들어? 돈 벌어서 힘들어? 너 지금 돈 좀 
번다고, 직장 생활한다고 유세해? 벌지 마, 임마! 너 안 벌어두 먹고 살어! 이 
자식아! 니가 무슨 공주야? 왜 기집애가 집안 일 하나 안 거들어, 엉? 니 엄마가 
종이냐, 니 눈엔 엄마가 종으로 보여, 임마!" 
"누가 그렇대요?" 
"어디서 말대꾸야!" 
연수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대들자 정박사는 곧 딸을 때리기라도 할 듯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애한테. 그리고 아무리 
처남이 밉다지만 어떻게 처남댁을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해요." 
황망히 남편을 가로막으며 사태를 수습하려는 인희씨는 눈길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눈치 빠른 근덕댁이 마루를 닦다 말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형님. 그게 아니구요." 
인희씨의 푸념이 계속 되었다. 
"어머니, 나랑 당신 아니면 남들은 보지도 못하는데, 당신이 좀 일찍 들어오지,  술 먹지 말고!" 
인희씨는 정작 자신이 화난 이유는 연수 때문이 아니고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둘러치며 애써 딸을 감싸주려 하고 있었다. 정박사는 그런 아내를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소리 좀 그만 지르시라구요!" 
그 말이 다시 도화선이 되었다.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이층으로 올라가는 
딸의 뒤통수에 대고 정박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뭐? 힘들어 죽겠어? 이 자식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 임마! 니가 니 
엄마만큼 힘들어? 니 엄마가 지금 어떤 줄이나 알아, 임마?" 
어제부터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는 계속 알 수 없는 말뿐이다. 왜 자꾸 
엄마 얘기를 저렇게 이상하게 하시는 걸까. 밖에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들어와 식구들을 달달 볶는 게 분명하다. 워낙 성격 자체가 그런 분이니까. 
아무튼 지금 연수는 지나치게 과민해진 아버지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박사는 그런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상해 하는 아내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나와, 해줄 얘기가 있어." 
"이 밤중에 어딜 나가요?" 
"당신 아픈 거, 얼마나 안 좋은지 말해 줄게." 
"그런 걸 뭣하러 밖에 나가서 말해?" 
인희씨는 여전히 이층 계단 쪽으로 가 있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얘기가 길어. 나오라면 좀 나와!" 
마침내 정박사는 싫다는 아내를 반강제로 이끌다시피 해서 마당으로 나왔다. 
당장 내일이면 입원을 시켜야 하고, 수술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곤혹스러운 건 본인에게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말해요, 어서. 그래, 어디가 그렇게 나쁘대요?" 
" 다 나쁘대." 
"아픈 데가 없는데 어떻게 다 나뻐?" 
막상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입을 떼기가 쉽지 않다. 정박사는 차마 아내를 
마주보지도 못한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한 잉크빛 하늘 저편에 눈썹 크기 만한 초승달이 뒤로 넘어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여자 나이 쉰일곱이나 되도록 자신은 아내한테 저 
초승달만큼도 해준 게 없었다. 늘 애처로웠던 것도 마음뿐,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살아왔다. 어느 하루 이렇듯 단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부부가 삼십 년 만에 이렇게 나란히 앉아 달을 보며 나눌 수 있는 얘기가 고작 사형 선고라니. 
정박사는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믐을 며칠 앞둔 밤이라 달은 아까보다 더 창백하고 야윈 것 같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더 뽑아 물었다. 
"암이야." 
이윽고 정박사는 그 혐오스런 단어를 입에 올려야 했다. 
"암?" 
"그래." 
예상외로 아내는 전혀 놀라는 기색도, 당황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무슨 암?" 
"자궁암." 
이 양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어린애처럼 되묻는 아내를 정박사는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그녀가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초기야? 안 아픈 거 보니까 초기가 맞나 보네. 그래요?" 
정박사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곤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자궁 들어내야 해요?"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박사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반응은 태연하기만 하다. 
"까짓 거 들어내지, 뭐." 
그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정박사도 뭔가 할 말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아내의 병세는 까짓 자궁 하나 들어내는 수술쯤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아내를 상대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처지였다. 기껏 말해야 할 진실이 죽음뿐이라니. 사람의 목숨이 어쩌면 
이렇듯 속수무책일 수 있단 말인가. 
아내한테 세상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는 암이라는 얘기를, 그것도 심각하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명색이 의사라는 작자가 아무런 대책을 말해 줄 수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정박사는 그야말로 가슴이 답답해 팽창된 심장이 그대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처럼 긴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담배나 좀 꺼요." 
아내는 자신의 병보다도 남편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더 싫다는 듯 짜증을 낸다. 
정박사는 굳은 얼굴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런 남편을 곁눈질을 하며 
인희씨가 오히려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제 쓸데도 없는 자궁 들어내는데 뭐가 어째서 그래요? 구파발 선자도, 
평창동 계 친구도 들어냈다는데 뭐. 아이구 차라리 잘됐어. 혹시나 싶어 
나두 조마조마하두만. 이제 이 나이에 애날 일이 있어, 달거릴 할 거야? 아이구 
난 그런 거 하나두 겁이 안 나네. 사는 게 무섭지. 그런 게 겁나?"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대범한 척하던 그녀도 마음 한켠으론 개운치가 
않았던지 옷깃을 여미며 진저리를 쳤다. 
"어서 들어가요, 청승 떨지 말고. 추워 아픈 데도 없이 그런 병이 왜  걸렸대?" 
" 안 아퍼?" 
"아프면, 뭐 대신 아파 줄래요?" 
정박사는 끝내 조금도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반문하는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이 여자, 속으론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랴.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아프게 짓눌렀다. 


어느새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영석은 한 시간이 넘도록 누군가와 통화중이다. 이럴 때일수록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절실해지는 건 왜일까. 인사도 없이 영석의 아파트를 빠져 나올 
때만 해도 다시 전화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로부터 받은 
심한 모욕감으로 만신창이가 돼 버린 연수의 흐트러진 심사를 수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차영석이라는 남자 하나뿐이었다. 그는 결코 아버지와는 닮지 않은, 
연수가 아는 단 한 사람의 남자였다. 
수화기에선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만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누굴까. 그 
남자의 다감한 목소리를 이토록 오래 누리고 있는 상대는. 연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정수두 이제 총각 다 됐네. 술도 마시구, 우습다." 
제 방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정수를 근덕댁이 대견한 듯 보고 있다. 
그녀는 침대맡에 앉아 있다가 연수가 들어오자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이 차이가 십 년이 넘는데도 근덕댁은 연수나 정수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좀처럼 남에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시집 조카들의 유난한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귀여워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연수도 속으로는 항상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해 왔다. 
"연수야, 너무 속상해 하지 마. 안 그래도 형님 낼 입원하시는 것 땜에 걱정이 많으신가 봐." 
근덕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 연수는 그 말을 무심코 흘려 들었다. 이해심 많은 외숙모가 아버지 
편을 들며 자신을 위로하는 말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얼핏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누가 뭘 해요?" 
"누가 뭘 하다니 형님이 입원하신다잖아. 연수, 너 아직 모르고 있었나 부네?" 
근덕댁은 금시초문인 얘길 들고 어리둥절해 하는 연수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연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방광이 안 좋아 고생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원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한 며칠 걸릴 모양이야. 수술까지 한다던데?" 
점점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연수는 심란한 어조로 덧붙이는 근덕댁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나 심하대요?" 
"심하긴, 조금 그렇대. 사실 나두 잘 몰라. 오줌보가 잘못됐다고 그러는 거 
같던데. 내가 좀 그렇잖아. 뭘 들어두 통 머리에 안 남아 있어. 워낙 내가 닭대라기잖어." 
이런 식의 대화로는 도무지 궁금증을 풀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연수는 답답한 
마음에 얘길 하다 말고 정수 방을 나와 버렸다. 
연수는 안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안방에선 어머니가 옷가지들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혼잣말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일 당장 어떻게 수술을 해. 내년 봄에 수술하면 안 될 게 뭐 있어? 
새집에 들어가서 하면 일도 없구, 좀 좋아? 집에 일이 태산이구만, 생전에 안 써 
주던 신경을 귀찮게 다 쓰구.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부네. 으이그, 고약한 영감태기 같으니!" 
평생 한번 남편 뜻을 꺾어 본 적이 없는 인희씨는 늘 혼자서 입버릇처럼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저 입으로만 짜증을 부려 보는 것이다. 
연수는 말없이 안방 문을 도로 닫고 거실로 나왔다. 유리창 밖으로 정원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정박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올해 갓 예순을 
넘긴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쩐지 몹시도 초라하고 후줄근해 보였다. 
연수는 비로소 어제 오늘 못마땅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아버지가 앉아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정박사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연수는 괜히 움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이리 와 앉아라. 너한테 해줄 말이 있다." 
정박사가 담배를 비벼 끄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연수는 말없이 다가가 정박사의 앞쪽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둘 다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지는 않은 채였다. 
"느이 엄마, 낼 수술 들어간다." 
대체 무슨 병인데 수술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연수는 
조용히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암이다." 
"예?" 
"자궁암이다." 
그 순간 연수가 느낀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납득할 수 없는 
분노였다. 아버지는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늘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식구들을 지배하려 들었다. 무슨 큰일이 생겼어도 식구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병원이 남의 손에 넘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도 식구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야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는 격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일뿐만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식구들의 
의견 같은 건 묻지도 않고 모든 걸 자기 방식대로 처리했다. 그대마다 다른 
식구들은 그 뒷감당을 하느라 꿀먹은 벙어리처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에게 
어쩌면 저렇듯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필 그것도 수술을 하루 앞둔 상태에서. 
연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이제 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암이라면, 그 정도야 
어떻든 무엇보다 먼저 죽음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다. 
의학적 전문 지식이 없는 연수도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연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아버지의 독단적인 사고방식을 
경멸하며 야멸차게 따지고 들었다. 
"진작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좀 전에 있었던 불유쾌한 언쟁의 뒤끝이 부녀지간에 아직 앙금으로 남아 있던 
터였다. 딸의 추궁에 응하는 정박사의 말투도 곱진 못했다. 
"니가 언제부터 니 엄말 그렇게 챙겼냐?" 
그 말엔 연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꼭 저런 식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 
버리는 아버지의 폭언엔 진저리가 났다. 
연수는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수술만 하면 아무 이상 없는 거예요?" 
" 그래." 
정박사의 대답은 왠지 맥살이 풀려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말투에 답답해진 연수가 재차 물었다. 
"정말이죠?" 
"그렇다잖니!" 
정박사는 의사인 아버지한테 다짐이라도 받아두겠다는 투로 다그쳐 묻는 
딸에게 결국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는 딸의 물음에 속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아마 충격받을 거^36^예요. 제가 나중에 얘기할게요." 
연수는 그렇게 말한 뒤 먼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부모한텐 항상 
뻣뻣하기만 한 녀석이 그래도 제 동생은 챙길 줄 아는군. 
정박사는 그런 딸이 한편으론 가상해 보였다. 그는 거실로 들어서는 딸의 축 
처진 어깨를 돌아보며 담뱃갑을 열었다. 초저녁에 두 갑째 샀던 담배는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수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인희씨는 거기 있지 않았다. 
건넌방으로 가 보았다. 어느새 정신없이 잠에 취해 늘어져 있는 근덕댁을 
내려다보며 상주댁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이가 소복하네, 드런 년!" 
상주댁은 잠자는 근덕댁의 머릿속을 뒤적여가며 뭔가를 자꾸 먹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가 이를 잡아먹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근덕댁은 몹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연수는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 잡는 재미에 빠져 있는 할머니를 우울한 시선으로 보다 문을 닫았다. 
화장실 쪽에서 인희씨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손잡이를 살짝 당겨 
보았다. 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안에서 들을 수 있게 노크한 다음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일 보게?" 
"아뇨." 
인희씨는 변기에 앉은 채로 아랫배를 양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소변이 여의치 않아 끙끙 앓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무심하게 흘려 들었던 게 죄스러워, 연수는 목이 메인다. 그녀는 화장실 문틀에 
기대선 채로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인희씨가 볼일을 볼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서 있느냐는 투로 물었다. 
연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인희씨는 그 말에 고통스러워 하던 표정을 애써 감추며 빙그레 웃었다. 
"별 거 아니야. 초기는 들어내기만 하면 깨끗하대. 혹시라도 정수 알게 하지 
말구. 지레 놀라 펄쩍 뛴다. 물혹 났다구, 아주 쉬운 수술이라고 해. 너무 걱정 
말구. 우리 나이엔 이런 수술 많이 한다." 
"네. 아프진 않죠?" 
"안 아퍼. 어여 들어가 자. 늦었구만." 
연수는 아직 초기라는 어머니의 설명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속으로 
어머니가 초기 중에서도 아주 초기인 상태, 암이라는 병명만 갖다붙였을 뿐, 
알고 보면 그 정도야 암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극히 양호한 상태이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아버지와의 냉랭한 대화를 통해선 어느 것 하나 어머니의 병세를 짐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다만 어머니가 암이라는 사실을 말해 줬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의 대수롭지 않아 하는 태도에서나마 나름대로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이튿날. 
연수는 회사의 결근계를 내고 어머니의 입원 준비를 도왔다. 
가족들이 병원에 가져갈 짐을 트렁크에 싣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인희씨는 
안에서 나오질 않는다. 간병인만 있는 집에 시어머니를 두고 나오기가 영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정박사는 대문 앞에 서서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엄마 빨리 나오라 그래. 아버지 또 화내시겠다." 
백미러를 통해 정박사의 초조한 모습을 보던 정수가 짜증을 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정수는 어머니의 수술보다도 아버지의 히스테리가 더 
부담스러운 눈치다. 연수는 벌써 세 번째 경적을 울렸다. 
인희씨는 안에서 시어머니 점심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이날 따라 투정도 안 
부리고 얌전히 밥그릇을 비운 시어머니가 스스로 물까지 마시는 모습이 인희씨 
보기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어서 가세요. 기다리시나 본데." 
경적 소리에 이어 간병인이 채근하는 말을 듣고서야 인희씨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아줌마, 어디 가?" 
"놀러." 
며느라가 일어설 기색을 보이자 상주댁은 불안한 듯 눈망울을 굴린다. 
인희씨는 차마 그런 시어머니를 떼놓기가 어려워 몸과 마음이 다 무겁다. 
그렇지만 웃는 낯으로 시어머니를 다독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시어머니가 또 응석을 부렸다. 
"나두 데려가." 
"싫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어머니가 들고 있던 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나쁜 년, 기어이 날 버릴라구." 
상주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며느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 데리구 가라, 이년아. 나 데리구 가! 너 혼자는 못 간다. 이년!" 
인희씨는 마구 약을 쓰며 매달리는 시어머니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밖에선 연신 재촉하느라 경적을 울려댔다. 
"나두 데려가라, 응? 나두 데리구 가!" 
상주댁의 성화는 이제 사정조로 바뀌었다. 저러다가 시어머니의 눈은 곧 
뿌옇게 흐려져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름투성이의 
노안이 금방 흥건해지고 있다. 그런 시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동자가 기어이 
인희씨의 마음을 후벼 파고 만다. 
당장 입원을 안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유난을 떠는 남편만 
아니었다면 수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게 인희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 불 같은 성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희씨는 할 수 없이 납덩이같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을 나서야 했다. 
"수술을 해도 내년 봄에 하자니까. 뭐 대단한 병이라구. 노친넬 며칠씩이나 
떼어놓구 수술하면 퍽두 맘 편하겠다." 
사람이 암이라는데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희씨는 병원에 가는 
동안 내내 시어머니 걱정뿐이었다. 
연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서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거나 애써 
불안감을 숨기려 하는 기미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씩씩함은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그녀가 워낙 자기 몸에 대해서 무심할 뿐더러 
성격적으로 낙천적인 때문이었다. 
정작 인희씨 본인보다 더 불안해 하고 조급해 하는 쪽은 정박사였다. 그는 
하룻밤 새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 굳은 
표정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내의 푸념에 뭐라고 면박이라도 했을 터였다. 
연수는 얼핏 아버지의 꾹 다문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무슨 걱정이 저렇게 많은 걸까. 
연수는 문득 저 어두운 심연에서 알 수 없는 조그만 불안감이 하나 떠오르는 걸 보았다. 
하지만 연수는 곧, 평소에 워낙 건강한 어머니였으니까, 아버지도 그래서 
충격을 더 심하게 받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이내 저 앞쪽에 종합병원이 보였다. 
장박사의 배려로 병실은 미리 잡혀 있었다. 
연수와 근덕댁이 병실을 정리하는 동안 인희씨는 심란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은 비교적 깨끗한 독방이었다. 
"이게 무슨 호사래? 나 같은 사람한테 박사들이 줄줄이 붙구?" 
잠시 정박사와 정수가 밖으로 나간 사이, 수술을 집도할 장박사와 윤박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인희씨는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따 세 시에 수술 들어갈 건데, 괜찮죠?" 
장박사가 부드럽게 묻자 인희씨는 끄덕이며 윤박사를 향해 물었다. 
"우리 집 양반은?" 
"차트 보고 계세요. 같이 들어갈 거예요." 
인희씨는 윤박사의 설명에 더욱 마음이 놓이는 듯 여전히 밝게 웃었다. 
"뭐니뭐니 해도 신랑이 좋은가 보네." 
"그럼, 좋지." 
연수는 어머니가 장박사와 편안히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조용히 별실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일로 걱정이 됐던지 벌써 여러 차례 영석의 전화번호가 
호출기에 찍혀 있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 다감한 마음 씀씀이가 늘 가슴 한 
자락을 따뜻하게 채워 주곤 했다. 
연수는 혹 어젯밤 일로 그가 마음 상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병원을 나와 
외따로 떨어진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아무 일 없는 거지? 어젯밤부터 내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전화를 걸자마자 영석은 걱정스런 음성으로 대뜸 안부부터 물어왔다. 연수는 
새삼 뿌듯한 신뢰감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야?" 
"네, 괜찮아요." 
"거긴 어딘데?" 
"병원이에요." 
"뭐, 병원? 병원엔 무슨 일로?" 
"엄마, 수술 들어가요." 
"어머니가? 어떡하니? 너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정말 괜찮은 거야?" 
그는 자꾸 묻는다. 묻는 한마디 한마디가 온통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차 있다. 
이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울적했던 일들은 모두 먼지처럼 하찮게 날아가 버린다. 
연수는 영석의 달콤한 목소리에 점점 몽롱한 충만감으로 도취되어 가고 있다. 
"나, 보고 싶지 않니?" 
"보고 싶어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에요." 
"왜? 근처에서 잠깐이라도 보면 안 될까?" 
"오지 마세요. 제가 상황봐서 전화 드릴게요." 
"꼭 전화할 거지?" 
"네. 참, 부인 왔어요?" 
"아직." 
"그럼 아직두 먹는 게 그렇겠네." 
"그렇지 뭐." 
"사서 먹는 밥이라두 잘 챙겨 두세요." 
"보고 싶다." 
"저두요." 
"사랑해." 
수천 번을 들어도 가슴이 아린 단어, 보고 싶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 
연수는 전화를 걸 때마다 영석의 그 말을 들으면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늘 보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짧은 단어가 주는 여운만큼도 길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 그 어떤 단어보다 가혹하게 느껴지는 까닭도 
그래서였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따로 있어야 하는 이상한, 그런, 내 사랑. 
수화기를 내려놓은 연수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힘없이 
발길을 돌리려다 문득 병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인철과 눈이 마주쳤다. 
"엄만 좀 어떠시니?" 
"곧 수술 들어가요." 
"괜찮으실 거야."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 전화했었어. 너, 밥은 먹었니?" 
"생각 없어요." 
연수는 인철의 안타까운 눈빛을 의식적으로 피한 채 병원을 향해 앞서 
걸었다. 이상한 일이다. 왜 이 사람의 호의는 늘 당연한거나 지나친 것으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마치 인철이 영석이 설 자리를 가로채기라도 한 듯  내심 짜증을 내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알리는 수술실 앞 빨간 표지판이 유난히 낯설고 무섭게 다가왔다. 
연수는 어머니가 수술복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현실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다. 불안해 하기는 정수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는 아까부터 화장실로 
복도로 왔다갔다하며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 
간호사들이 끄는 이동 침대에 수술복차림으로 실려 나오는 어머니를 보자 정수는 약간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 안 무섭지?" 
"으응, 안 무서워, 하나두." 
인희씨는 아직도 어리광이 몸에 밴 막내의 물음에 마음이 저려왔던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연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근덕댁이 울상을 지으며 덧붙였다. 
"어떡해요, 형님?" 
"괜찮다니까 그러네." 
인희씨의 눈가에 보일락말락 이슬이 맺혔다. 
연수는 뭔가 한마디라도 위안이 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는다. 
인희씨는 불현듯 그윽한 눈길로 아들 딸을 번갈아 응시하였다. 
이윽고 이동 침대를 잠시 멈추고 섰던 간호사들이 수술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니다." 
인희씨의 모습은 곧이어 빨간 표지판이 내걸린 수술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수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석에 앉아 있는 길지 않은 시간이 그녀에겐 마치 몇 
십년이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수는 흡연실과 병원 복도를 오락가락하며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줄창 
피워대고 있었고, 근덕댁은 화장실에서 혼자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연수는 수술실 앞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수술의 성공을 뜻하는 의사들이 오케이 사인을 흉내내는 것이다. 
엄마, 아무 일 없을 거^36^예요. 힘내세요. 이제 곧 활짝 웃으며 퇴원하실 거예요. 
수술 들어가기 전 어머니께 하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연수가 앉은 한켠에 씁쓸한 표정의 인철이 물끄러미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몇 달 전부터 거기 서 있었던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석상인 양 굳어 있었다. 
어느 순간 연수의 눈시울에 고여 있던 눈물이 핑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철은 문득 연수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가만 고개를 숙였다. 한 움큼의 슬픔이 
철선처럼 날아와 인철의 마음을 헤집고 있었던 것이다. 
장박사의 진찰실 안에선 정박사가 아내의 수술을 앞두고 차트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중이었다. 
온통 암세포가 번져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판단조차 어렵게 된 아내의 
사진 앞에서, 그는 이미 난파된 자신의 배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선장처럼 
마지막 돌파구를 찾아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곳저곳 들춰 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여기 보이는 이것만 빼내고 나오자고." 
사진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단서라도 찾아내기 위해 속이 타들어가는 
정박사와는 달리, 정작 수술을 집도해야 할 장박사의 충고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정박사는 그 충고를 무시하며 앞에 놓인 사진을 손으로 짚어 보였다. 
"여긴 어때? 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덴 몰라두 여기랑 여긴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장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박사가 손으로 짚어 보이는 부분도 이미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정박사는 구원을 청하듯 윤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녀로서도 뻔히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은 못 되었다. 
"말해 봐!, 이건 어떻게 할 수 있잖아? 니들이 안 하겠다면 내가라도 해!" 
"좀 침착해. 곧 수술 들어가. 일단 보고 얘기하자구." 
"장선배 말대로 하세요." 
정박사는 자신도 저렇듯 냉정할 때가 있었던가 싶은 정도로 의사로서의 직업 
의식에 투철한 두 사람의 차분한 모습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사실 
속으로는 그도 그들의 충고가 전혀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이라도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마지막 일 퍼센트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일 퍼센트가 정박사에겐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들에겐 애초부터 무시하고 
넘어가야 할 어거지 수치에 불과했다. 그게 바로 회복 불능의 환자에 대한, 
의사와 환자, 혹은 환자 가족의 터무니 없는 수치대조표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후에도 수없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경험한 의사와, 생에 단 한 번 죽음을 
맞는 환자와의 이 엄청난 괴리감. 의사들은 자기들의 그러한 소신을 이성적 
판단이라 믿지만,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전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누가 
뭐라든 말든 그 좁쌀 같은 자신들의 모든 걸 걸어 놓는다. 바보라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박사는 지금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의사들을 상대로 그 좁쌀 같은 가능성에 
대해, 그것밖에 선택할 수 없는 절박한 자기 처지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 심정 충분히 알고 있으니 우선 들어가 보기나 하자구." 
정박사의 굳어진 심기를 의식한 듯 장박사가 설득조로 말을 바꿨다. 
정박사는 장박사가 이끄는 대로 수술 준비를 향했다. 그도 더 이상 부질없는 
언쟁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후, 정박사가 일행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섰을 때, 아내는 이미 마취제를 맞고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불빛이 드러난 아내의 마취된 모습을 처연하게 내려다보았다. 
푸른 형광등 불빛 아래 수술복 차림으로 누워 있는 아내는 얼핏 보면 그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도 그로선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으면서도 정박사는 아내의 출산을 지켜봐 주지 
못했었다. 두 아이 모두 공교롭게도 그가 외국에 가 있을 때 출산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이라고 한 것은 고작 그 두 번뿐이었다. 평생 소처럼 일만 
하는 아내를 그는 당연히 건강하겠거니 여기며 살아왔다. 그 동안 아픈 데가 왜 
없었겠는가. 그저 평생을 시어머니 모시랴, 남편 떠받들랴, 자식 키우랴 해서 
자기 몸을 종 부리 듯 했을 아내의 못난 세월이 이제 와 정박사의 손끝을 
저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밥 먹듯이 수술실에 드나들며 수술을 집도한 
베테랑 의사임에도 지금 이 순간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정박사가 침착하게 장갑 낀 손을 들어 간호사를 불렀다. 
"메스!" 
간호사의 손에서 메스를 건네 받은 장박사가 마침내 아내의 희디흰 속살을 한 줄 획으로 그었다. 
정박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박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흉측하게 갈라진 아내의 뱃속을 들여다보았다. 
갈라진 아내의 배 안에 그것들이 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것들을 뱃속에 담아둔 
채 아내는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뱃속을 들여다보던 장박사와 윤박사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가 이토록 심한 줄은 그 누구도 짐작 못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암세포가 형성될 때는 대개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하나는 
종기처럼 엉겨 있는 형태고, 다른 하나는 꽃가루처럼 분산되어 나타나는 
형태이다. 웬만큼 상황이 진전된 경우라 할지라도 암세포가 서로 종기처럼 엉겨 
있는 상태에선 눈에 보이는 걸 떼어내는 수술이 가능하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뱃속에 있는 저것들은, 흩뿌려 놓은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분산되어 메스를 대는 순간 무서운 속도로 몸뚱아리를 헤집고 다닐 것들이었다. 
정박사는 더 이상 좌측으로도, 우측으로도 키를 돌릴 수 없는 갈 데 없는 
난파선의 선장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장박사와 윤박사가 고통스럽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내 모습이 차라리 부럽게 느껴졌다. 
정박사는 자는 아내를 깨워서라도, 이 여편네야, 너 지금 어떡할 거냐고, 그래도 
수술을 하는 게 좋겠느냐고, 그렇게라도 해주면 죽어도 덜 서운하겠느냐 
고 묻고 싶었다. 아니면, 이 못된 여편네가 왜 나한테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하게 
만드느냐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모든 게 당신 뜻대로^36^예요, 당신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지요,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무 불평 없이 잠들어 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정박사는 수술대에서 돌아선 채로 한참을 넋 나간 듯 서 있었다. 이어 그는 
조용히 마스크를 벗어 수술실 한켠에 내려놓고 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광등의 푸른 불빛 아래 죽음보다 무거운 침묵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그는 문득 할 말을 찾은 사람처럼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닫어라!" 
사실상 수술 포기를 선언하는 정박사의 아픈 절규였다. 이윽고 수술실 벽에 
기대선 그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난파선에서 튕겨져 나온 
보잘것 없는 한개 나뭇조각처럼 출렁거리며 천천히 수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장박사와 윤박사는 금방 나동그라질 듯 휘청거리며 수술실을 나서는 그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