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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드라마_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3/3_노희경

Lazy Bear 2008. 11. 6. 15:3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저자: 노희경

 

19 
예년보다 조금 늦게 첫눈이 내렸고, 인희씨의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되었다.  초저녁부터 속이 거북하다며 힘들어 하던 인희씨는 한밤중에 화장실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구토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간에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좌변기에 매달려 처음 헛구역질을 해대던 인희씨는 배 아래쪽에서 목구멍으로  치받쳐 오르는 통증과 함께 쓴물을 쏟아냈다. 수술이 끝났고 항암제도 꾸준히 먹어 
이제 별탈 없으리라 믿었던 인희씨는 헛구역질 끝에 올라오는 노란 토사물을 보고  와락 겁을 먹었다. 
"여보!" 
신음하는 인희씨의 입가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힘없이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인희씨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구토와 더불어 온몸을 관통하는 한기. 그것만으로도 인희씨의 공포는 통증의 고통 상이었다. 
"여보!" 
안방에서 자고 있던 정박사가 눈을 뜬 것은 새벽 두 시경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나지막이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 
숨이 끊어질 듯 잦아드는 아내의 신음소리. 
정박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쪽은 화장실 방향이었다. 그는 후다닥 방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주저앉아 몸을 숙인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아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박사는 섬?한 예감으로 잠시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이내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내의 몸을 돌려 일으켜 세웠다. 아내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괜찮아?" 
정박사가 떨리는 손길로 아내의 뺨을 어루만지려 할 때였다. 
쓰러질 듯 몸을 휘청이던 그녀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핏덩이를 토했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튄 핏물이 정박사의 손과 옷을 붉게 물들였다. 
"여보!" 
정박사는 마침내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남편의 가슴에 묻고 아내가 묻는다. 
"여보, 나 왜 이래, 수술했는데 나 왜 이래? 여보." 
아내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고 있다. 
정박사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등을 쓸어 주었다. 이 여자의 마음이, 몸이 
이렇게 떨리는데도 자신이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일밖엔 
없었다. 그러나 이 연약한 여자의 몸뚱아리를 갉아먹고 있는 고통은 그가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준다고 해서 덜어지는 게 결코 아니었다. 
"여보, 나 왜 이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본능적으로 구원을 청하고 있다. 
정박사는 차라리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내의 눈빛에 서린 공포를 
차마 볼 수가 없다. 
아내여! 내가 그 아픔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박사는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 고통의 배의 배라도 대신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아내는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라움과 공포로 뒤범벅이 된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박사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죽나 봐, 그치! 여보, 안 낫나 봐, 그치?" 
인희씨는 한사코 고개를 들어 남편의 눈을 보려 한다. 그런 아내의 눈을 남편은 
또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여보, 나 왜 이러니? 나 아퍼, 여보." 
헛구역질에 놀라고, 으스스 휘몰아치는 한기에 놀라고, 입술 사이로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는 핏덩어리에 놀란 아내가 이번엔 거울을 보고 넋이 나갔다. 
"된장 고추장이 다 썩었던데 나 죽지? 나 죽는 거지?" 
마침내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늙은 여자의 절규가 적막에 싸여 
있는 집 안을 친친 감고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자고 있던 두 남매가 각자 방에서 
뛰쳐나와 아래층으로 달려왔다. 
"엄마!" 
"정수야!" 
인희씨는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울부짖던 어머니가 고개를 드는 순간 와락 달려들어 그 
얼굴 넋 나간 듯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핏물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수는 겁에 질린 채 어머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연수는 어머니를 안은 채 짐승처럼 목울음을 토해내는 아버지와 넋 나간 듯 
울부짖고 있는 정수 뒤에 그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눈물은 이제부터 시작될 고통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여전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은 영원히 죽지도, 새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내리는 눈은 늘 첫눈이다. 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첫눈뿐이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던가.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20 
인희씨는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죽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본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의 
목숨이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에 정원 의자에 앉아 잠시 잠깐 인색하게 내리쬐는 겨울 햇빛을 쏘이고 
있자면, 인희씨는 시시각각 흐려 오는 제 목숨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도 먼 데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다. 
처음 그것은 징그럽고 불유쾌한 유혹이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손짓. 듣지 않으려 귀를 막아도 그것은 은밀한 속삭임으로, 역한 기운으로, 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이미 그녀 곁에 와 있었다. 
손으로도 그것을 만질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컥컥 숨이 막혀 와 정신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면 이윽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붉은 피! 온몸을 찢어발길 
듯 엄습하는 잦은 통증. 전생을 되짚어 통틀어도 이렇게 심하게 아픈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순간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그녀를 이승에서 저 강 너머로 
밀어내고 있었다. 
추적추적 겨울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창가에 와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죽음은 어서 오라 손짓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매일 반복되는 엄청난 통증과 악몽이 
밤낮으로 그녀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미동도 없이 꼬박 창가에 앉아 정성 들여 가꾼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난 어느 날이었다. 
뿌리가 잘린 꽃처럼 점점 시들어가는 인희씨의 얼굴에 모처럼 단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다 
이제 마악 집에 도착한 여인처럼, 인희씨는 그립고 사무치는 눈빛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안방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전혀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방 안에서 그녀가 맨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장롱이었다. 
세월의 더께로 인해 이미 날고 초라해진 장롱은 그래도 안방에선 가장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새집으로 이사가면 바꾸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가져가는 게 좋지 싶다. 내가 
죽더라도 저 장롱이나마 남아서. 그러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이젠 내 
몫이 아니다. 산 자의 인생이고 산 자의 몫이다. 저 자개장롱이든 무엇이든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새집 안방에 다시 틀고 앉든 말든, 내 죽은 육신 태울 
불쏘시개가 되든 말든. 
그녀는 장롱한테 미안한 생각마저 들어 한참 눈을 떼지 못한다. 
서랍 안에는 삼십 년 동안 살 비비며 살아온 남편의 옷가지들. 살다 보니 
그것들이 남편의 체온 보다 더 자주 그녀의 손길을 타곤 했다. 
젊어서는 왠지 손님처럼 어렵고 낯설기만 하던 남편이었기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야속한 심사를 옷가지에 대고 넋두리하던 날이 많았다. 
다듬이 방망이로 빨랫감들을 두들겨가며, 조물조물 양말짝들을 주물러가며, 때 낀 
와이셔츠를 솔로 박박 문질러가며 속으로 얼마나 많은 푸념들을 늘어놓았던가. 
그 아슴한 세월의 저편 어딘가 아직도 빨랫줄에 걸려 펄럭이고 있을 젊은 날의 고단한 기억들. 
인희씨는 이제 그 기억들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흘러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그래서 그저 한 번쯤은 다시 돌아가도 좋을 추억만이 그녀를 목 메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갑 속에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적지 않았던 살림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그녀의 보물창고 같은 것이다. 삼십 년 동안 꼼꼼히 적은 가계부만 
해도 수십 권.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귀퉁이가 헤진 것도 있지만, 한 집안의 역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안쪽은 대부분 멀쩡한 상태였다. 
남편한테 첫 월급을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처음 몇 권을 들춰 보아도 목돈을 
받아쓴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시댁 식구들 제사며, 생신, 챙겨야 할 경조사 
따위들로만 대부분 채워진 가계부들이 거의 열 권 남짓이나 되었다. 
며느리가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시어머니는 경제권을 넘겨 주지 않았다. 
그런 시어머니한테 남편의 월급을 쪼개 받으며 살아야 했던 세월의 흔적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외 드문드문 차입금이 적혀 있거나 지불해야 할 이자에 대한 기록. 알푼달푼 
모아 적금 탄 일, 시어머니 환갑 잔치 해드린 일, 시아버지 묘소에 상석 세운 일, 
연수 치아 교정해 준 일, 정수 간염 치료한 일, 집들이 음식 장만한 일, 도배 새로 
한 일, 남편 양복 맞춰 입히고 연수 입학식 간 일, 은행에서 대출받은 일. 그런 
소소한 기록들이 담겨 있는 가계부는 그 전 것들보다 몇 배 더 반들반들 귀가 닳아 
있다. 거기서부터가 직접 살림을 맡아 살아온 세월이었다. 
인희씨는 방바닥에 가계부며 통장, 잡다한 서류들을 다 꺼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 중 몇 가지를 챙겨 문갑 속에 따로 보관해 놓고 
남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형님,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세요?" 
근덕댁이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계속되는 병간호에 지치기도 했으련만 그녀는 항상 다람쥐처럼 손발이 빠르고 
호기심도 많다. 
인희씨는 요 며칠 그녀가 남몰래 화장실에서 찔찔 짜곤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있다. 천성이 쾌활하다 보니 우거지상으로 지내는 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시누이 걱정으로 몹시 풀이 죽어 있는 건 사실이다. 어디 시누이 걱정뿐이랴. 
팔불출이 제 남편 때문에 속도 어지간히 썩어 지낼 터였다. 
"마침 잘 왔다. 이리와 앉아." 
근덕댁이 막상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면서도 앉으라는 말에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본다 누가 정색을 하는 데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 주변머리가 그녀를 자꾸 
어리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희씨는 그런 올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반쯤 접은 노란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 
"왜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한사코 그 봉투를 받지 않으려 손사래를 치면서 근덕댁은 울상을 지었다. 
시누이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해서 자신을 내보내려는 줄 착각한 것이다. 
인희씨는 근덕댁이 질색을 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고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근덕이 놔두구 여기서 살 거야?" 
"요즘은 들어오지두 않아요." 
"집에 가. 밀린 일이 태산일 텐데." 
그 말엔 근덕댁도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집 걱정으로 심란할 
때가 있긴 했던 것이다. 
대신 근덕댁이 시누이가 내민 봉투를 슬그머니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간호사라면 싫어요." 
"나 돈 없어. 돈 아니야. 뭔지는 집에 가서 보구, 어여 가지구 가." 
"제가 있으면 밥이라두 하는데." 
근덕댁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워낙 정이 많은 
데다 친언니처럼 따르던 시누이를 병석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인희씨로서는 그 모든 걸 이해하기 때문에 더더욱 올케를 돌려 보내야만 했다. 
"나, 연수가 지어 주는 밥 먹을래." 
"형님 옆에 있고 싶은데." 
"귀찮어. 내 옆에 사람 많어." 
근덕댁은 자꾸 운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지껄이고, 시도때도 없이 눈물도 많고, 거꾸로 웃기도 잘 하는 
푼수데기였지만 속정은 무척 깊은 여자였다. 
인희씨는 착한 올케를 촉촉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지막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꼭 우리 근덕이 옆에 있어. 그놈이 뭐라고 해도 어디 가지 말구, 꼭 옆에 있어. 
제 놈이 지금 힘이 넘쳐 꽥꽥대긴 해두 늙어 봐. 올케한테 미안한 거 알구 잘할 걸.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구 내가 업어 키운 애야. 걔가 부모 일찍 여의고 정을 못 받고 
자라 그렇지, 본성은 나쁜 애가 아니야." 
" 아, 알아요." 
"울지 마, 다 큰 사람이." 
인희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올케 손에 다시 노란 봉투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이거, 근덕이 하고 올케만 아는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근덕댁이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꿈벅거렸다. 
인희씨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어여 가. 나 피곤해서 눕고 싶어." 
인희씨가 손짓을 하자 근덕댁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인희씨는 조용히 
쓰러지듯 방바닥에 누웠다. 
어디선가 그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땅속 깊은 곳에선 듯 하늘 밖에선 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부르고 있었다. 
인희씨는 이제 그 소리가 무섭지 않다. 오래된 친구처럼 친밀하게도 느껴진다.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그녀의 동반자였다 

21 
모처럼 재수 좋은 날이다. 
근덕은 두둑해진 주머니를 한 번 만져 보고는 입이 째져라 호탕하게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밤중에 웬 미친놈이 저러나 수상한 눈길로 힐끔거렸다. 그게 
뭐 대수냐, 내 기분이 좋으면 장땡이지. 
근덕은 휘파람까지 휙휙 불어제치며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한달음에 오르는 중이었다. 
노름판에서 돈을 따보기는 몇 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그 동안 갖다 바친 돈만 해도 얼마였던가. 까짓 잃은 돈이야 술먹고 없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이제 목돈도 들어왔으니 한 몇 달 마음잡고 착실히 살아볼까 싶기도 했다. 
한 번 해본 생각이긴 해도 그나마 자신이 기특할 정도로 건전해졌을 땐 꼭 돈을 
손에 쥐었을 때뿐이었다. 돈이 궁할 땐 어떻게든 빨리 돈을 변통해 노름판으로 
달려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고, 목돈이 좀 생기면 잠시 잠깐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 
볼까 하고 제법 멀쩡한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 죄 
그렇듯 쉽게 번 돈이라고 흥청망청 날리다 보면 며칠 못가 기어이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마는 게 근덕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자 약점이었다. 어쨌거나 기분이 
잔뜩 좋아진 근덕은 호기롭게 대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아내의 낡은 구두 뒤축을 힐끗 보며 이 참에 옷이라고 
한벌 쫘악 뽑아 입혀야겠다 마음먹었다. 
성질이 수다스럽고 종알종알 바가지 긁는 덴 선수였지만, 그래도 저만큼 무던한 
여편네도 없었다. 
근덕은 아내를 놀래 줄 심산으로 소리 없이 마루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는 무슨 까닭인지 벽에 등을 기댄 채 곡절 많은 여자처럼 징징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너, 왜 울어? 서방 죽었냐, 왜 울고 지랄이야?" 
근덕은 청승맞게 울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며 웃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기껏 기분이 좋아서 모처럼 잘해 주려고 했더니 그 꼴을 보자 버럭 짜증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 금세 마음이 풀어진 근덕은 바지 주머니에서 돈 뭉치를 꺼내 보이며 
아내를 웃겨 보려고 했다. 
"야, 너 이만한 돈 봤냐? 못 봤지?" 
그러나 여전히 아내는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무슨 서류 하나를 손에 펴 
들고 말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꼴이 꼭 넋 나간 여편네 같았다. 
근덕은 돈 뭉치를 좀더 확실히 보여 주려고 몸을 굽혀 그녀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야, 이거 돈이라니까 돈 주는데 싫어?" 
근덕은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넋 나간 듯 눈물을 줄줄 흘리던 아내 눈에서 순간적으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찰나였다. 그 불길은 그녀의 눈에서 코로, 양볼로, 입술로, 얼굴 전체로 
퍼지더니, 이내 성난 암사자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덕은 순식간에 맹수로 돌변한 아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통에 팔뚝을 냅다 
물어뜯기고 말았다. 
"아악!" 
다급해진 근덕은 비명을 지르며 아내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래도 아내는 근덕의 팔뚝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어찌나 억세게 물어뜯겼던지 
팔뚝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게 미쳤나. 놔, 아퍼, 이년아!" 
근덕은 소리소리 고함을 치며 아내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워낙에 억세고 근력 좋은 여자라서 여간해선 팔뚝을 놓아 줄 기세가 아니었다. 
근덕은 죽자고 달려드는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제야 
아내는 제풀에 지쳐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너 돌았니? 왜 그래, 엉?" 
근덕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아직도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물린 자리가 욱신거렸다. 
근덕은 물린 팔을 한쪽 손으로 감싸 쥐며 아내를 험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어, 이 이간아!" 
여자 눈에 핏발이 서렸다. 
근덕은 그 앙칼지고 표독스런 눈매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까지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저토록 매서운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그렇지 세상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여자가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볼까 생각하니, 근덕은 아닌게 아니라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잡아먹을 듯이 남편을 노려보던 아내가 씩씩대며 손에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그에게 내던졌다. 
"그게 뭔지나 알어?" 
근덕은 하도 기막힌 꼴을 다한 직후라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는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지껏 부부싸움도 숱하게 했었다. 하지만 아내가 지금처럼 길길이 날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다못해 오입질을 하다 들켰을 때에도 저렇게 악착같이 덤벼들진 
않았던 것이다. 
근덕은 멍청하게 서서 아내가 던져 준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야?" 
어디서 빚 독촉이라고 온 줄만 알았던 근덕은 또 한번 얼떨떨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가입자가 김인희, 누나 이름으로 된 생명보험 증서였다. 
"니 누나 곧 죽는데" 
보험증서를 쥔 근덕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아내가 악을 쓰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그거, 니 누나가 자기 죽으면 너한테 줄려고 식구들 몰래 들어놓은 거래! 알어? 
이 나쁜 인간아! 행여, 행여 니가 그 맘 알겠다, 행여 니가 알겠어? 너 같은 
인간이 뭘 알어?" 
근덕은 입을 쩍 벌린 채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악에 받친 아내가 빗자루를 들어 사정없이 남편의 등짝을 두들겨팼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갖다 도박해라! 그것도 갖다 도박하라구, 이 인간아! 그것도 갖다 
기집질해, 이 인간아! 너 이제 어떻게 살래 어떻게 살래!" 
근덕은 아내가 엉엉 울며 악담을 퍼붓는 데도 그 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두들겨 패다 지친 그녀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발버둥을 치는 모습도 
그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그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그 눈물이 눈을 
흐리게 하고, 그 눈물이 귀를 멀게 했다. 
누나가 죽을 줄은 몰랐다. 설마 그 산처럼 든든하던 누나가 죽을 줄은 몰랐다. 
누나는 평생 그의 어머니였고, 평생 아무때나 대문이 열려 있는 고향 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누나가 죽다니, 죽다니 지난 번에 갔을 때 그 악담만 안 했더라도 
이렇듯 마음이 쓰리진 않았을 것을. 천하에 불상놈 같이 그 모진 악담만 안 했더라도 
잊고 있었던 눈물이 한 줄기 그의 가슴을 적시는가 싶더니 이 내 물꼬가 터진 듯 
흘러나왔다. 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건, 그가 꼼짝도 못하고 선 채로 돌처럼 굳어 
있는 건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그 눈물 탓이었다.  

 

22 
며칠 이상한 침묵이 집안을 싸고 돌았다. 
인희씨는 여전히 아팠고,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했다. 어느땐 좌변기를 붙잡고 
죽은 듯 쓰러져 있기도 했다. 
연수는 시체처럼 늘어진 채 아버지 품에 안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그럴 때마다 정작 연수가 숨이 막히는 건 어머니를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의 막막한 표정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통증이 와도 전처럼 놀라거나 울부짖지는 않았다. 그저 식구들 모르게 
화장실에서 오래 헛구역질을 해대고, 그러다가 쓰러져 잠드는 게 인희씨의 하루 
일과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희씨의 사투를 식구들 모두 참담한 침묵으로 
지켜보는 동안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수는 아침 밥을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깜짝 놀랐다. 이른 시간인데도 거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고 주방에선 귀에 익은 도마 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황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놔두세요. 제가 할 테니 쉬세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빼앗으려 했다. 
인희씨는 벌써 쌀을 씻어 밥을 안친 뒤 호박이며 감자, 대파 등속을 가지런히 
다듬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다쳐, 엄마가 할게." 
인희씨는 연수가 못미더운 듯 칼을 내주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인희씨는 버럭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놔 둬라. 내가 벌써 송장 됐어? 왜 다들 사람 움직이는 걸 못봐?" 
"힘드시잖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연수는 어머니의 고집에 더 어쩌지 못하고 식탁으로 가 앉았다. 
인희씨는 그 말씨며 태도가 병 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솜씨 
있게 도마질을 하며 인희씨가 물었다. 
"일 안 나가?" 
"오늘 잠깐 나가 봐야 해요." 
"일 나가. 일 다 그만두고 나 죽기 기다렸다, 나 죽으면 손가락 빨고 살 거야?" 
연수는 오늘 그 동안의 결근계에 이어 아^36^예 휴직계까지 내려던 참이었다. 
연수는 어머니에게 이렇다 할 대답도 못하고 식탁에 앉아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된장찌개엔 꼭 쌀뜨물을 쓰고, 처음 끊일 때부터 호박 넣으라구 몇 번을 
말하니? 다 끓은 뒤 넣으면 서걱서걱한 게 그게 무슨 맛이 있어? 모양 내다 맛 
버려. 된장도 하나 제대로 못 끓이구 어떻게 시집을 갈라는지." 
예전에 연수가 간혹 주방일을 거들 때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잔소리였다. 
인희씨는 냄비에 재료들을 쓸어넣은 뒤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다. 그런 다음에 
손을 씻고 앞치마를 벗어 있던 자리에 걸어놓은 뒤 안방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안방에선 정박사가 이불을 개고 있었다. 평소 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서비스였다. 
정박사는 이불을 개서 장롱에 넣으려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내를 보며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잘 하면서 왜 진작 안 했누?" 
정박사는 별 표정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인희씨가 자리에 앉자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빈 속에 그 누무 담배는?" 
아내의 걱정 섞인 잔소리도 요즘 들어선 꽤 오랜만인 것 같다. 
며칠 그녀는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의식도 못하는 것 같았었다. 
그래서 정박사는 모처럼 기운을 차린 듯한 아내의 잔소리가 외려 반갑게 들렸다. 
정박사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희씨가 퉁명스레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만류했다. 
"그냥 피워요." 
정박사는 도로 주저앉아 담배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는 동안 인희씨는 무릎걸음으로 문갑 쪽으로 다가가 서류들이 가득 든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다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정박사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볼멘소리로 설명했다. 
"통장이랑 집문서, 땅문서, 보험, 뭐 그런 거예요." 
정박사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쪽에 치워 놓았던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을 보지 않고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대충 보니까, 당신 언제 죽을랑가는 몰라도 아껴 쓰면 죽을 때까지는 쓰겠대. 
당신은 좋겠수, 부자라." 
거기까지 말하고는 이내 짜증이 나는지 목청을 다소 높였다. 
"거기 노란 통장은 연수 시집 보낼 거고, 흰 통장은 정수 거니까 애저녁에 손댈 생각 말구요." 
정박사는 아내가 가리키는 통장도, 아내 얼굴도 보지 않고 한숨처럼 내뱉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어." 
"그만둬요." 
인희씨는 단호하게 정박사의 말을 묵살하며 옆으로 틀어 앉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남편을 똑바로 응시하며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뭐 당신 이뻐서 주는 줄 알아요? 나 죽고 나서 통장 어딨나, 울지도 않고 
자식 새끼들 앞세워 찾아나설까 봐 주는 거^36^예요. 그 꼴 보기 싫어서." 
"안 그럴 테니 넣어 둬." 
"그럴지 안 그럴지 어떻게 알어." 
정박사는 이런 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측은한 한편 그만하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일견 짜증을 내고 있지만 그건 결국 슬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란 걸 정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희씨는 남편을 바라보며 무척 속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시간 있을 때 나 일산 좀 데리고 가요." 
정박사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정박사는 요즘 매일 
일산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가구도 들여놓고 집 정리를 하긴 
했는데, 도저히 아내를 데리고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거에 그 집은 아내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은 아내의 죽을 자리인  것이다. 
" 집이 얼추 다 됐을 텐데." 
인희씨가 눈치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박사는 말없이 방을 나왔다. 뒤에서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으이구, 저 주변머리. 죽은 사람 소원두 들어 준다는데, 그게 뭐 큰 소원이라구, 
말을 안 한대. 으이구, 속 터져!" 
정박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내 소원대로 해주자. 직장엔 며칠 휴가계를 냈다고 둘러대고 내일이라도 당장 
일산으로 가자.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쩌면 매일 아침 출근하는 척하고 집을 나서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소원이 있다면 이 참에 아내와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갖고, 
변변찮으나마 손수 밥이라도 한 끼 지어 아내에게 먹이고 싶었다. 그다지 모양새가 
잘 갖춰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직장에 갈 일도 없고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정박사는 그 동안 아내가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휴가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건 아내가 말한 그대로 
자신의 주변머리 없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출근하셔야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연수가 부르는 소리에 주방쪽으로 향했다. 
처남댁이 살림을 해줄 땐 밥 먹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편치 않더니 연수가 
집안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만 했다. 
정박사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아내는 노모에게 가져갈 밥상을 챙기고 있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연수가 머뭇거리며 쟁반을 건네 주었다. 
"넌 밥이나 먹어. 나야 급할 거 하나 없으니까." 
연수는 예사롭게 핀잔하며 주방을 나서는 어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이구 추워라." 
상주댁은 춥다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집을 옮겨야 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팔리지 않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그 놈의 병만 안 났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아라도 볼 
텐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직장 일로 바쁜 남편한테 부탁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복덕방에서 임자를 물색해 
주겠다고 전화로 약속은 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집을 제대로 지었나, 일산에도 가보아야 하는데. 인희씨는 이래저래 속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잇, 퉤!" 
갑자기 상주댁이 밥알을 뱉어냈다. 밥알 몇 개가 그대로 며느리 얼굴에 날아와 
붙었다. 인희씨는 깜짝 놀랐다. 얌전히 떠먹여 주는 대로 밥을 받아먹던 시어머니가 
또 노망을 부리는 것이었다. 
"왜 그런데, 또?" 
시어머니가 바닥에 뱉어낸 밥알을 보고 속상한 인희씨가 짜증을 냈다. 시어머니는 
책 토라져서 된장국에 비빈 밥알들을 가리켰다. 
"썩었어." 
"썩긴 뭐가 썩어. 아침에 끓인 게." 
"이년이!" 
상주댁은 뱉어낸 밥알을 손으로 집어서 며느리 눈 앞으로 바짝 들이댔다. 
"이게 안 썩었어? 누런데, 이게 안 썩어?" 
"되지도 않는 말 어지간히 해요, 정말! 이게 뭐가 썩어, 된장에 비빈 밥이 다 
누렇지, 어디가 썩어!" 
인희씨는 화가 나는지 신경질을 부렸다. 
상주댁은 밥그릇을 들어보이며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따지는 며느리를 고까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밥그릇을 확 낚아채어 며느리 머리 
위에다 냅다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인희씨는 혼비백산을 했다. 
"이 노인네, 미쳤나 봐, 정말!" 
졸지에 밥알을 머리에 뒤집어쓴 며느리가 짜증을 내자 상주댁은 더욱 노여워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다, 이년아!" 
상주댁은 길길이 날뛰며 갑자기 방구석에 있는 요강 단지를 번쩍 집어 들었다. 
인희씨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와장창, 요강 깨지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인희씨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이구, 못 살어! 징글징글해 정말."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정박사와 연수, 정수는 갑자기 건넌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수저를 놓았다. 분명 어머니의 비명소리였다. 
식구들은 놀란 얼굴로 뛰어가 건넌방 방문을 열어 보았다. 
누런 밥알 찌꺼기와 오줌으로 범벅이 된 몰골로 인희씨는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방바닥은 깨진 요강 단지와 엎어진 그릇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상주댁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며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썩은 거 너나 먹어라, 이년. 우리 아들 병원 차려 준다더니 병원두 안 차려 
주고, 이 나쁜 년. 죽어, 이년, 죽어!" 
"놔, 아퍼." 
상주댁은 앙칼진 눈으로 며느리를 노려보다 기어이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노망든 시어머니의 힘을 당할 길이 없었던 인희씨는 그저 머리채를 휘둘린 채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정박사가 눈에 불을 튀기는 사이 연수가 황급히 달려들어 할머니를 뜯어말렸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할머니를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정수가 할머니를 뜯어말렸다. 
"이 손 놔요, 놔요!" 
"나쁜 년, 내 집 망친 년. 이년! 시에밀 까다만 콩깍지로 아는 이년, 이년!" 
정수까지 합세해 간신히 뜯어말린 뒤에도 상주댁의 노여운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인희씨가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못 살어, 내가. 못산다, 내가!" 
울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여자는 지린내가 진동하는 방 한켠에 거지꼴을 하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또 한 여자는 그런 며느리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팔을 걷어 붙인 채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박사는 차마 못볼 꼴을 보고 난 사람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연수가 운전하는 차는 어느덧 정박사의 병원 앞에 와 멎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정박사는 아까부터 굳은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며 멍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다 왔어요." 
연수는 넋 나간 듯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정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원 앞에 
왔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쩐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으응, 그래." 
약간 당황한 몸짓으로 차 문을 열던 정박사가 연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 있니?" 
"휴직계 내고 조금 있다 들어갈 거예요." 
"그래? 그럼 나 좀 보자."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무슨 일이세요?" 
후임자에게 업무를 정리해서 넘겨 주려면 시간이 얼마쯤 걸릴 것 같았다. 
정박사는 되묻는 연수를 건너다보며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냥 볼까 싶어서." 
"제가 전화 드릴게요." 
연수는 지금으로선 약속 시간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해서 적당히 
시간을 봐가며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정박사로선 딸의 그 제의 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아니다. 나도 오늘 진료 안 보고 일찍 휴가계만 내고 나올 거야. 내가 근처에 
가서 전화하마." 
" 그러실래요?" 
"응. 그러자."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차에서 내린 정박사는 이내 몸을 돌리지 않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병원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버진 저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걸까. 어색하게 차 안에 남아 있던 연수가 
또 한번 정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들어가세요." 
"먼저 가라." 
연수는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통해 그 후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정박사는 딸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천천히 발길을 옮겨 한길 
쪽으로 향했다. 
윤박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나 남았다. 그 동안 혼자 
어디든 가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 시간에 제일 만만한 곳이라면 서점 아니면 공원이었다. 
실업자 생활도 오래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더니 정박사가 그 격이었다. 그는 
일없이 거리를 좀 배회하다 서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서점으로 들어섰다. 
그는 서점에 가서도 취업이니 창업이니 하는 직업 관련 서적이 있는 쪽으로는 
발도 떼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그런 책이나 들춰보며 남몰래 한숨짓는 사오십대 
사내의 뒷모습을 그 누구라서 좋게 보아 주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보기에도 
그런 사내들의 뒷모습이 영 궁상스러워 보였다. 
무슨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그들 옆에 서 있으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에 쫓기는 젊은 직장인처럼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문서적이나 몇 권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래 보면 
괜스레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그저 길어야 한 시간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또 남는다. 
이번엔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이번에도 요령을 피운다. 공원에서도 오래 
죽치고 앉아 있는 축들은 대개 하릴없이 노인들이나 실업자들이다. 
몇 번 와 보니 아^36^예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일하는 부류들도 적지 
않았다.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표정들. 사내들도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처럼 
수다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몇몇 중늙은이는 공연히 무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말참견을 하거나 장기판 같은 데서 눈총을 받아가며 훈수를 두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영 마뜩찮아 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시시콜콜 참견이다. 어디든 
끼어 함께 참여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은 저마다 따로 앉아 비둘기에게 팝콘을 던져 주거나 
꽁초를 빨며 멍하니 앉아 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이승에서의 삶에 흥미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그들은 마치 도인 한가지로 세월을 관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두셋 모여 앉은 노인들도 별 말이 없다. 꾹 다문 입술 새로 가끔 
담배 연기만 비어져 나올 뿐이다. 이미 할 말은 다 했고, 이제 남은 일이라곤 손에 
묻은 먼지를 털 듯 툭툭 시간을 터는 일만 남았다는 듯이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다. 
정박사는 자신이 아직 그들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또한 패기 있게 뭔가를 다시 
시작할 만큼 젊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무슨 신명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랴, 싶은 
아득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곧 황혼이지, 황혼이야. 정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파고다공원을 빠져 나왔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더 
쓸쓸해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는 파고다공원에서 삼청공원으로, 다시 효창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힘이 들면, 잠시 공원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한 표정을 짓고 벤치에 앉았다가 이내 장소를 옮기는 것이다. 정박사는 끝끝내 
나는 아닌 척, 하는 그런 가식의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커피숍에 나타난 윤박사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언니 약이에요." 
"고맙다." 
"통증이 심하시죠?" 
"그런 모양이야." 
윤박사는 정박사의 우울한 대답에 잠자코 차를 마시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동안 왜 통 안오셨어요?" 
"일산에 새집을 지었거든. 나 요즘 거기 다녀. 거기 가면 쓸모없는 나두 할 일이 
많아." 
윤박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정박사를 내심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며 뜸을 들였다가 말을 꺼냈다. 
"저, 전에 부탁하신 얘긴데요." 
정박사가 일전에 부탁한 취직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응, 좀 알아봤어?" 
"네. 알아보긴 했는데." 
윤박사는 왠지 말하기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정박사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건소 소장 자리예요. 일산 쪽에 새로 생긴." 
순간, 정박사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비로소 윤박사가 선뜻 말을 못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건소 소장 자리라는 게 보수면이나 직업 환경으로나 의사 
시절보다 못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더 좋은 자리가 있었으면 했는데." 
"무슨 말이야, 보건소 일이면 어때, 괜찮아. 고맙다, 윤아!" 
정박사는 그나마 일자리가 생긴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는 모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윤박사에게 물었다. 
"그 자리 틀림없는 거지?" 
"그럼요." 
"고맙다. 윤아. 내가 나중에 한턱 쓸게." 
그는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윤박사의 제의를 마다하고 커피숍을 나섰다. 
정박사는 괜하게 휴우 한숨이 나왔다. 다름 아닌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나절 거리를 배회할 때와는 달리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정박사는 우선 집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인수인계를 끝낸 뒤 사무실을 나서던 연수는 마침 거래처에 들렀다 
오는 인철과 마주쳤다. 
인철은 연수가 다시 출근하는 줄로만 알고 반색을 했다. 
"저, 휴직계 냈어요."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저두 괜찮으실 줄 알았어요." 
인철은 연수의 뜻밖의 말에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괜찮지 않다면 
그렇다면. 
" 잘 해드려라." 
인철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외면한 채 연수가 말을 이었다. 
"못해 드린 거, 나중에 한이 될까 두려워 받은 만큼 돌려 드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밥도 잘 못 짓구, 빨래도 내가 하면 때가 잘 안 져요. 청소를 해도 
한두 군데는 꼭 빠뜨리구." 
"자식이 부모한테 받은 걸 다 돌려 줄 순 없어." 
인철이 자동판매기 커피를 뽑아 건네며 제법 인생을 산 듯한 중늙은이투로  말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이 
결혼하는 건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걸 주체할 수 없어서 털어놓을 델 찾는 거라구. 
그래서 자식을 낳는 거라구." 
" 그렇겠네요." 
연수는 천천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두, 몸조심해라." 
"고마워요." 
연수는 얼마쯤 젖은 시선으로 인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인철이 가만 연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연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밖에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23 
정박사는 아침에 병원 앞에서 헤어질 때와는 딴판의 표정으로 백화점 로비에 서  있었다. 
연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어떤 생기 같은 걸 감지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연수는 자꾸 아버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이윽고 연수는 아버지를 태우고 거리로 나섰다. 
"집에 일찍 가봐야 할 텐데."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연수는 백미러를 통해 아버지를 보며 집 걱정부터 했다. 아침에 그 험한 꼴을 
보고 나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어머니의 병보다는 할머니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할머니 주무시는 거 보고 나왔으니 괜찮을 거다." 
"집에 들렀다 오셨어요?" 
"그래." 
한 번 잠들면 한나절 이상은 깨지 않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연수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백화점 주변 도로를 빠져 나갈 때 연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산 집으로 가자." 
"일산으로요?" 
정박사는 연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자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니 엄마, 거기 한번 데려가 달라는데, 집이 어수선해서 나 혼자 정리하자니  어째 시원찮구나." 
그랬었구나. 
연수는 비로소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늘 무뚝뚝하고 냉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 저렇듯 자상한 면도 있었다니. 연수는 괜히 코끝이  찡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막상 일산 집에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새집 문을 여니 포장을 뜯지 않은 가구들이며 살림 등속이 거실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거실에 놓은 집기들을 바라보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가구들은 제쳐두고, 아직 뜯지도 않은 포장지를 이것저것 들춰 보니 벽걸이 장식용 
액자며 소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다 아버지가 준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색깔이 좀 그렇지? 내가 어제 대충 샀는데. 내 맘에도 그냥 썩 드는 건 아닌데."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걸레까지 빨아가지고 나오던 정박사가 
겸연쩍은 듯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 큰 덩치에 걸레를 들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한편, 연수에겐 퍽이나 놀랍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정박사 자신은 연수가 자기를 어찌 보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아뇨." 
연수는 아버지가 무색해 하지 않도록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얼른 걸레를 
뺏어 들었다. 
"좋아요. 걸레질은 제가 할 게요. 아버진 그냥 앉아 계세요." 
"이거 저쪽으로 치우고 바닥도 한 번 닦아야 할 텐데. 그냥 하면 니 엄마 
먼지 냄새난다구 싫어할 텐데." 
정박사는 어색하게 가구들을 가리켜 보이며 딸에게 이것저것 주의를 주었다. 
연수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죠, 뭐. 그럼 가구부터 일단 저쪽으로 옮길까요?" 
"그러자." 
정박사는 딸의 선선한 대꾸에 만족스러워 하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가구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 이렇게 늙으셨는지 아버지는 작은 소파 하나 옮기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연수는 정박사와 함께 가구들을 하나씩 옮기면서 문득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는 늙고 힘없는 자신이 민망한지 둘이 해야 될 일도 혼자 옮기겠다며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딸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으신 거다. 
연수는 아버지의 반쯤 벗겨진 앞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간간이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둘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구들을 옮기고 나니, 이번엔 바닥 청소가 남아 
있었다. 연수가 공들여 걸레질을 하는 동안 정박사는 벽에 액자들을 걸었다. 
"연수야, 이거 여기 걸면 되는 거냐?" 
"네, 아버지. 약간만 왼쪽으로요." 
정박사는 딸이 시키는 대로 액자를 고쳐 걸며 묻는다. 
"됐지?" 
연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액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버지의 기우뚱한 몸집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이번엔 약간 오른쪽으로요." 
생전 안 해본 일이라 정박사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는 무척 열심히 액자 거는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딸에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아뇨, 비뚤어졌어요." 
"됐냐?" 
"네, 아버지." 
겨우겨우 거실 정리가 끝났고, 이번엔 커튼을 달 차례였다. 
연수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꼼꼼히 살림살이들을 준비했는지 보는 
것마다 감탄할 정도였다. 
커튼 색상이며 침대 커버, 바닥에 깐 양탄자까지도 어머니의 취향을 그대로 따른 
것들이었다. 
이 모든 걸 혼자 준비하며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연수는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침대 커버를 씌워 놓은 침대맡에 앉아 보고는 무심코 허탈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 
모습에 와락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시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박사는 연수가 앉았던 침대맡에 가 앉았다. 
나이 들어 이불 개는 것도 힘들다며, 이사 가면 안방에도 침대는 꼭 들여놓겠다던 
아내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머지않아 아내는 가고, 그녀가 바라던 것들만 남아 있을 이 집. 
정박사는 아무래도 이 집에 온전하게 정 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 커피 드세요." 
바깥에서 연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박사는 급히 붉어진 눈시울을 꾹꾹 눌러 닦고 거실로 나왔다. 
" 지난 번에 죄송했어요." 
거실 소파에 앉아 부녀가 차를 마시던 중 연수가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정박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뭘?" 
연수는 일없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저한테, 저 자신한테 화가 났었어요." 
" 그래." 
"죄송해요." 
정박사는 딸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위로해주었다. 
"아니다. 니 엄마가 불쌍해서 그렇지, 난 괜찮다. 너도 너무 속상해 하지 마라.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니 엄마가 지금 죽는 게 다행이라고. 남보다 고생을 
두 배는 더한 사람, 좀더 일찍 좋은 데로 간다고,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말에 연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 잘 해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잘 해주고 싶었지 그 맘 알 거다." 
정박사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연수가 들고 있는 찻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 잔, 이쁘지?" 
" 네." 
"니 엄마 줄려고 내가 특별히 산 거야. 너 시집 가두 그건 못 준다." 
말을 마친 정박사가 희미하게 웃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샀다는 찻잔을 말없이 들여다 보았다. 집안에서 
유독 어머니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이길래 안 그래도 속으로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다소 촌스럽긴 했지만 그 잔은, 황금색 금박 장식이 휘황찬란한 어머니의 
그 잔은,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황후를 위해 바치는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표시였다. 
저녁 여덟 시. 
인희씨는 대문 밖을 서성이며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인희씨는 요즘 초저녁부터 식구들이 그립다. 
인희씨는 추위도 잊은 채 아까부터 큰길가를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아이들과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골목 아래쪽에서 정수가 여자 친구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정수는 손에 한 
아름이나 되는 꽃을 들었다. 
"엄마 꽃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그래. 내가 사야 했는데." 
정수가 여자 친구 재영을 미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재영은 그런 정수를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그 웃음 끝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사드리고 싶었어." 
정수는 재영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문득 다른 소리를 했다. 
"난 요즘 니가 참 부럽다." 
"왜? 대학 다녀서? 엄마한테 너 대학생인 거 보여 주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마.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 드렸잖아. 발표 때까지 사실 수도 있고." 
"그게 아냐." 
재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정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니네 엄만 건강하시잖아? 오래 사실 거구. 난 그게 부러워. 요즘은 엄마가 건강한 
사람, 엄마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제일 부러워." 
재영은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정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가. 요즘은 만날 때마다 니가 날 바래다 주는구나. 싫겠다?" 
"아니, 내가 바래다 주는 것두 나쁘진 않아." 
"고맙다, 어서 가." 
"조금만 더 걷지 뭐." 
그렇게 둘이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골목을 내려오던 인희씨가 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수야!" 
정수는 어디선지 정답게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 
집 쪽에서 인희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가까이 
와서는 신기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정수 여자 친군가 보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쁘게 생겼네." 
인희씨는 쑥스럽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정수가 시계를 보며 재영에게 눈짓을 했다. 
"가봐." 
재영이 정수를 향해 알았다는 눈짓을 하고는 인희씨를 바라보았다. 
"저, 다음에 또 뵐게요." 
"왜? 집에 들어갔다 가지?" 
인희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재영에게 아쉬운 듯 말을 붙였다. 
집에 데려가 차라도 한잔 먹여 보내고 싶은 것이다. 
"아니에요. 늦었는걸요. 가볼게요." 
재영이 웃으며 정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인희씨는 재영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아이가 어쩌면 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하는 못내 궁금하고 아쉬운 눈길이다. 
"저만큼이나 꽃두 이쁜 걸 샀네." 
멀어져가는 재영의 뒷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인희씨는 문득 정수가 건네 
준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았다. 
정수는 어머니 등을 감싸안고 걸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웃긴다, 야. 너두 사내라고 기집애를 다 사귀고." 
인희씨는 하던 말 끝에 뜬금없이 물었다. 
"입은 맞춰 봤어?" 
정수는 어머니의 짓궂은 물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펄쩍 뛰기도 좀 그랬다.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정수는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인희씨의 그 물음에는 장성한 아들에 대한 신기하고 대견한 마음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참하게 생겼드라. 꼭 니 누나 닮은 것 같애. 나 처녀 때 같기도 하고." 
"그럼, 재영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다 닮았다는 얘기네?" 
"그럼!" 
모자가 다정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연수의 차였다. 
인희씨는 남편과 딸이 동시에 내리는 모습을 보고 반색을 했다. 
"이게 웬일이야. 오늘은 온 가족이 시간을 맞췄네?" 
"추운데 왜 나왔어?" 
"빨리 들어가요, 엄마. 감기 들겠어요." 
"괜찮아. 좋은 걸, 뭐." 
모처럼 네 식구가 나란히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인희씨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노친네 안 깨셨나 모르겠네." 
앞서 가던 인희씨가 중얼거리며 막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 나쁜 년! 또 날 버리고 갈라고?" 
갑자기 상주댁이 몽둥이를 들고 덤벼들었다. 
인희씨는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상주댁이 내리친 몽둥이에 그대로 맞았다. 썩은 
고목 넘어지듯 인희씨는 그 자리에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이쿠!"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 뒤따라 들어오던 세 사람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맨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간 연수가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엄마, 엄마, 괜찮아요?" 
인희씨의 이마엔 선홍빛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연수는 다급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인희씨는 벌써부터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격분한 
정수가 순식간에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모질게 악을 썼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차라리 돌아가시라구요!" 
할머니의 몽둥이를 뺏어 든 정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새끼, 이 나쁜 새끼!" 
상주댁은 정수가 고함을 치자 분해서 입가를 씰룩거리며 팔을 치켜들었다. 이어 
손주의 등짝을 사정 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던 정박사가 휙 몸을 돌려 신발장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서랍에서 망치와 못을 꺼내들었다. 
정박사는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노모를 번쩍 안아 들은 채  건넌방으로 향했다. 
"놔라, 이노무 새끼. 놔, 어서 놔! 에미야!" 
상주댁이 정박사 팔에 안긴 채 발버둥을 쳤다. 
그때까지도 두 남매는 얼이 빠진 채 격분한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주댁은 정박사의 격분한 태도가 기가 질렸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 날 들고 어딜 가!" 
정박사는 노모를 거칠게 방바닥에 내려놓은 뒤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겁에 질린 노모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정박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하는 노모를 모질게 떼어놓고 방문을 닫아 버렸다. 
"아저씨, 왜 그래? 에미야, 살려 줘!" 
안에서 계속 상주댁의 겁먹은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던 인희씨가 비로소 힘없이 눈을 떴다. 
마침 정박사가 입에 물고 있던 못을 고쳐 들고 망치로 문을 때려 박으려던  참이었다. 
"에미야, 에미야!" 
상주댁이 잠긴 문을 손톱으로 마구 긁으며 울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수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뜯어말렸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쾅쾅 못을 때려 박았다. 
"왜 그래요, 왜 그래? 연수야 말려. 니 아부지 말려^5,5,5,456^" 
인희씨도 질겁을 해서 건넌방 쪽으로 기어가며 소리쳤다. 인희씨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외치며 힘들게 남편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박사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 못질을 해댔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진정하세요!"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연수와 정수는 엉엉 울어가며 아버지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그래도 정박사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얼굴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드러나는 건 그의 눈이 붉게 젖은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수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낸다고 생각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박사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인희씨가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신음하듯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마." 
정박사의 행동이 조금 누그러진 건 바로 그때였다. 그는 이내 망치질을 멈추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정박사의 눈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굵은 눈물이 아내의 이마를 적셨다. 
그 참에 정수가 얼른 달려들어 망치를 나꿔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며 
마당으로 나가 망치를 내던져 버렸다. 
연수는 아버지가 비통한 표정으로 숨만 헉헉 몰아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쓰러내렸다. 
"들어가, 연수야." 
인희씨가 힘없이 연수에게 손짓을 했다. 정박사가 말없이 마당으로 나간 뒤였다. 
연수는 어머니를 데려다 방에 눕힌 뒤 마당으로 향했다. 
"아버지." 
정박사는 마당에 선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고독한 뒷모습에 연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들어가라." 
"추워요." 
" 괜찮다. 가서 자라. 찬바람 들어간다." 
정박사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기인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수는 착잡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부질없이 가슴만 쓸어내렸다. 정수도 마당 
구석에 선 채 우는 지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24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늦도록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비탄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새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순간적인 격분을 못 이겨 한 행동이었지만, 노모를 방에 
가두고 못질을 하려 했던 자신에 대해서 그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새벽녘, 잠결에도 간간이 한숨을 내쉬는 정박사를 누군가가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인희씨였다. 그러나 정박사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조금씩 
잠의 수렁으로 잠기고 있었다. 
인희씨는 한동안 벽에 기대어 남편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헤아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구토가 일어 잠을 못이루고 쪼그려 앉은 채 불쑥불쑥 치미는 온몸의 
통증을 참아가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릴 땐 화장실에 가 토하는 것보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게 나았다. 이제 더 이상은 피를 토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남편은 이제 잠이 든 것 같다.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처량하게 
느껴지는 걸까. 인희씨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남편의 자는 모습을 벌써 한 
시간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속이 울렁거려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영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토기가 약간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녀는 주방으로 나섰다. 쓰리고 
메슥거리는 속을 달랠 겸 냉수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런데 속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울렁거렸다. 
인희씨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금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오장육부가 다 아프다. 내장이 서로 엉켜 사투라도 벌이는지 순간순간 찢어지는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망할 놈의 병은 왜 이다지 아픈 데도 많은가. 
쪼그린 채로 몸을 뒤틀며 헛구역질을 꾹꾹 눌러 참던 인희씨는 엉금엉금 기어 
주방을 나섰다. 죽음의 사신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이 바로 저 앞에 긴 휘장을 
펼치고 있었다. 인희씨는 손사래를 치며 겨우 그 그늘을 거둬냈다. 그러면 그 뒤에서 
또 한 겹의 그늘이 보란 듯 휘장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으." 
슬픔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인희씨의 목구멍에서 본능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 언저리로 축축한 식음땀이 흘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푸르르 떨었다. 
그때, 문득 인희씨는 건넌방을 돌아보았다. 가여운 노인네, 초저녁엔 또 얼마나 
놀랐으랴. 인희씨는 잠시 통증이 지나간 틈을 비집어 겨우 쪼그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시어머니 방으로 다가섰다. 
상주댁은 잠결에서조차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불을 한 움큼 끌어안고 몸을 
조그맣게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잠시 측은하게 내려다보다 이부자리를 바로 고쳐 깔고 
시어머니를 편하게 눕혔다. 이젠 이 작은 노인네 하나 눕히는 데도 힘이 부친다. 
인희씨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쉴새없이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상주댁은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지 간혹 몸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희씨 눈빛에 말로는 다 못할 어떤 착잡한 상념이 서렸다. 
젊어서는 사흘들이로 며느리를 잡아대던 시어머니. 그 매운 시집살이도 그다지 
견디지 못할 건 아니었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두 사람은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노인네와 세상에 기댈 언덕이라곤 남편밖에 
없었던 한 여자. 그렇게 두 여자가 그 한 남자를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만도 어언 
이십오 년이었다. 
미울 땐 여우 같은 며느리랑은 살아도 곰 같은 며느리랑은 못산다며 수시로 
자신을 구박하던 시어머니지만, 그래도 더러 며느리 좋아하는 호두과자 같은 걸 빈 
방에 들여놓아준 적도 있었다. 그땐 며느리 어디가 그렇게 이쁘셨을까. 남편 없는 
시집살이에 아이들마저 학교에 가 없는 날이면 그나마 시어머니 잔소리라도 들어야 
사람 사는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그 심란한 세월 다 보내고 늘그막에 미운 정 고운 정 담뿍 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로 서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여느 
모녀지간 부럽지 않게 깊은 속정을 나누는 그 별난 관계를 어찌 말로, 모양새로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희씨는 이불을 끌어올려 시어머니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다, 인희씨는 왠지 
한순간 흠칫 숨을 멈추었다. 
목숨이 무엇이건대, 사는 게 무엇이건대 죽을 날 가까운 노모가 아들한테 방문 
못질을 당하고, 손주놈한테 모진 소리를 들어야 하나. 이제 내 한 몸 죽어지면 끈 
떨어진 갓 모양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구박이나 당하며 사실 텐데. 나 가고 
나도 이 노인네 투정 부리며 밥 잘 드실까. 근력 좋게 심통 부리며 이년, 저년 욕도 
잘 하실까. 아니, 아니지. 
갑자기 인희씨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한참을 울었을까. 그녀의 슬픈 눈에 돌연 비장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어 이불 자락을 잡아채 시어머니 머리 끝까지 덮어 씌웠다. 
잠결에 숨이 막힌 시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인희씨는 눈을 꾹 감은 채 팔에 힘을 주었다. 온힘을 다해 이불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뭔지 모를 비애와 더불어 독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이미 인희씨의 
이마와 볼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었다. 
어머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 살았을 때 어머니가 죽어야 어머니도 편하고, 
그래야 나도 편히 눈을 감지. 이제 금방 만날 거야, 어머니. 저승에 가서 내가 백 배, 
천 배 더 효도할게. 
"어으으으." 
인희씨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시어머니의 신음에 잠시 멈칫 
했지만, 그녀는 이내 그 소리를 야멸차게 외면했다. 그리고 내처 그 늙은 목숨을 
모질게 눌러댔다. 
그 시각에 연수는 늦도록 가족 사진을 들춰 보며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낡은 
앨범의 곳곳에 온가족의 단란했던 한때가 마치 거짓말처럼 담겨 있었다. 연수는 그 
사진들을 새삼스런 눈으로 보고 또 보았다. 옛 사진을 보니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좋은 때가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처음 아버지 병원이 문을 열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고, 그 참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만큼은 할머니도 정신이 온전했고, 
아버지 얼굴에도 중년 남자의 자신감과 활력이 펄펄 넘쳤다. 
할머니를 한가운데 앉히고 부부가 평화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연수의 눈길을 끌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밝고 건강한 중년 여성이었다. 이 
모습으로 더도 말고 일 년만 더 식구들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그러면 연수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목숨도 무슨 물건처럼 내 것을 쪼개 남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연수는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층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하던 연수는 할머니방에서 이상한 신음이 나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할머니방으로 가 가만 방문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 연수는 웬 도둑이 
들어온 줄 알고 덜컥 놀라기부터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불 속에 든 할머니를 잡아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연수는 눈앞에 
캄캄해졌다. 그 이상한 소리는 바로 할머니의 신음이었던 것이다. 
연수는 황망히 달려들어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엄마, 엄마, 왜 그래요. 놔요, 이러면 안 돼요." 
인희씨는 딸의 다급한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이불을 잡아누르고 있었다. 
연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울부짖었다. 
"엄마, 제발 놓으세요! 아버지, 아버지!" 
연수는 있는 힘을 다해 어머니를 뜯어말렸지만, 도저히 어머니를 당해낼 수가 
없어 아버지를 소리쳐 불렀다. 
마치 인희씨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된다는 듯 시어머니를 마구 잡아누르고만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엄마!" 
그 소동에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정박사와 정수가 무작정 그녀를 잡아떼었다. 
그러나 숨을 헉헉대면서도 인희씨는 한사코 이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정박사와 정수 둘이서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들어내서야 겨우 그녀를 떼어낼 수 
있었다. 
연수는 후다닥 달려들어 얼른 이불을 젖혔다. 상주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희씨가 또다시 달려들어 팔을 뻗치는 
바람에 상주댁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죽어!" 
인희씨의 음성은 무척 단호하고 차가웠다. 
정박사가 아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왜 그래,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죽어!"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엄마!" 
정수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린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인희씨 입에서 비명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나랑 같이 죽자! 나 죽으면 어떻게 살래? 나랑 같이 죽자! 애들 
고생 그만 시키고, 나랑 같이 죽자! 어머니이." 
연수는 울컥 눈물이 치밀어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그때까지 정박사의 품에 안겨 있던 상주댁은 고통에 찬 며느리의 절규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상주댁은 얼이 빠진 건지, 아니면 그 와중에 잠시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얼핏 눈가에 이슬까지 맺혔다. 그 젖은 눈빛도 온전한 사람처럼 멀쩡하게 보였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이 스치고 지나간 바닷가처럼 집안에는 괴괴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몇 시간 전에 난리를 치른 집 같지 않게 얼마쯤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건 순전히 인희씨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일찍 깨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느 날과 전혀 다름없이 처신했던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가족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지만, 짐짓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듯 여느 날과 똑같이 처신했다. 우선 인희씨가 먼저 나서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도 더불어 그녀 하는 양을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씻긴다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상주댁은 
순한 양처럼 며느리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목욕탕 문이 딸깍 하고 닫히자 연수가 후다닥 달려갔다. 
"엄마, 엄마! 저랑 같이 해요, 엄마!" 
연수가 불안스런 목소리로 외치며 문을 두드려댔다. 모두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죄 한마음이 되어 목욕탕 안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박사는 아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연신 줄담배를 태웠다. 
그러나 안에서는 바깥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고부간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속옷 바람으로 좌변기 위에 앉혀 놓고 정성껏 
비누칠을 해서 온몸을 씻기고 있었다. 간밤의 일로 어찌나 놀랐던지 상주댁은 옷을 
입은 채로 그만 똥 오줌을 싸고 만 것이었다. 
"오늘뿐이야. 나 없으면 아무데나 똥 누고 그러면 안 돼. 안 그러실 거지?" 
마지막으로 발을 닦아 주며 인희씨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 그러실 거지? 오늘은 내가 놀라게 해서 그런 거지? 이제 그러면 안 돼?" 
인희씨는 어린애를 꾸짖듯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이 아파서 
물기 어린 눈으로 시어머니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엄마!" 
밖에서는 여전히 연수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희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36^예 대답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시어머니에게 
새옷을 갈아 입혔다. 
" 좋아?" 
상주댁은 말없이 며느리를 보고만 있다. 
인희씨가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개운하지?" 
상주댁은 어느덧 맑은 눈으로 며느리를 보고 있다. 어쩌면 정신이 돌아와 며느리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입으니까 꼭 새색시 같네." 
인희씨의 음성은 잔잔한 메아리가 되어 시어머니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싸우다 정든다고 나 어머니랑 정 많이 들었네. 친정 어머니 먼저 가시고, 애비 
공부한다고 객지 생활할 때, 애들 없구 외롭고 그럴 때도 어머닌 내 옆에 
있었는데 나 밉다고 해도 가끔 나한테 당신 좋아하시는 거 아꼈다가 주곤 
하셨는데 어머니 이제 기억 하나도 안 나지?" 
인희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어머니를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주댁의 눈빛에도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또 마음을 
놓지 못하는 연수의 목소리가 고부간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엄마?" 
그때였다. 여지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주댁이 연수가 있는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리 가, 이년아!" 
인희씨는 마침내 시어머니가 말문을 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어머니의 그 눈빛이며 표정이 모두 해맑다. 인희씨는 비로소 시어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닫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아까 미안해. 내 맘 알지?" 
시어머니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인희씨는 다시 시어머니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 하는 거 아닌데 어머니 정신 드실 때 혀라도 깨물어, 나 따라와. 
아범이랑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따라와, 기다릴게." 
상주댁은 자기 손목을 끌어다 얼굴에 갖다대며 흐느끼는 며느리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수록 며느리의 서러운 흐느낌을 잦아들 줄을 
몰랐다. 
25 
다음날 인희씨는 늦게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지지난 밤의 피곤이 이제사 인희씨를 곤한 잠에 빠뜨린 것이었다. 몹시 지친 듯 
곤하게 자는 인희씨를 깨우지 않고 식구들은 저마다 조심스럽게 나들이 준비를 
했다. 
그날은 정박사 부부가 단둘이 일산 새집으로 나들이를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연수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정수는 어머니의 짐을 챙겼다. 
건넌방에선 정박사가 노모에게 아침 밥을 떠먹여 드리는 중이었다. 
"아, 하세요." 
상주댁은 아들이 떠먹여 주는 죽을 가만가만 받아먹었다. 전에 없이 양순해진 
눈빛 가득 뭔가 골똘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우리 어머니 잘 드시네. 다시 아, 하세요." 
정박사는 아내 대신 노모에게 죽을 떠먹이며 자기도 모르게 아내를 흉내내고  있었다. 
노모는 얼핏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보였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가 
죽을 받아넘기며 간간이 뜻 모를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자, 이제 물 드시고 편안히 쉬고 계세요." 
정박사는 노모가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건넌방을  나왔다. 
주방에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나들이 준비는 안 하고, 내가 너무 오래 잤네." 
얼마 후 기지개를 켜며 인희씨가 주방으로 나왔다. 그녀는 연수가 끓이는 
된장찌개 냄비를 열어 보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쌀뜨물로 끓였니?" 
"네." 
연수가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림 해두 되겠네." 
인희씨는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집어먹으며 대견한 듯 딸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맛나다." 
"간이 맞아요?" 
"잘 맞네." 
모처럼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보니 연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찌개를 식탁으로 옮겨 놓고 수저도 보기 좋게 늘어놓았다. 그때 난데없이 어머니가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연수야." 
"네." 
"연수야." 
지극히 다정한 음성이었다. 
연수는 문득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인희씨는 연수가 대답을 해도 자꾸 이름을 부른다. 
"어째 자꾸 우리 딸 이름이 부르고 싶네, 연수야." 
연수는 공연히 안 닦아도 될 그릇들을 닦는 척하며 어머니가 부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연수야." 
" 네." 
"난 우리 연수가 참 이쁘다." 
순간 왈칵 목이 메이는 건 연수뿐만이 아니었다. 
인희씨는 숫기 없는 딸의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굳는 듯 서 있었다. 
불쌍한 것, 저것 시집 보내 놓고 극성맞은 친정 어머니 소리 들어가며 총각김치며 
밑반찬이며 열심히 퍼다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었는데. 예전에 친정 
엄마한테 못 받았던 것 저 애 시집보내고 다 해주려고 했는데.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던데, 정말 그러면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 
인희씨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잊고 딸의 뒷모습만을 마냥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일어나셨네?" 
어느 틈에 정수가 다가와 뒤에서 인희씨를 껴안았다. 인희씨는 이내 눈물을 닦고 
감정을 수습했다. 
정박사도 식탁에 와 앉았다. 정수는 어머니가 우는 걸 짐짓 모르는 체하고 누나를 
도와 식탁에 밥을 날랐다. 
이윽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수는 인희씨 곁에 앉아서 이것저것 수저에 반찬들을 얹어 주었다. 
"이번엔 뭘 줄까? 무나물? 버섯?" 
인희씨는 아들이 놓아 주는 대로 가만히 밥술을 입에 넣어 넘기고 있었다. 
정박사는 밥을 먹으며 눈으로는 신문을 뒤적거리는 척 그 모습을 못 본 체하고, 
연수는 물을 떠다 놓는다, 찌개를 더 가져온다하며 괜스레 자리를 뜨곤 했다. 
"뭐, 두부? 엄마, 말 해. 엄마 찌개 먹고 싶은데 내가 무나물 주고, 엄마 버섯 먹고 
싶은데 내가 두부 줄까 봐 그래?" 
아무 말 없이 수저만 들여다보고 있는 인희씨를 향해 정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잠자코 있던 인희씨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두부 주면 두부가 먹고 싶었던 것 같고, 네가 버섯 주면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랬다. 지금 인희씨는 아들이 수저에 모래를 얹어 준다 해도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처럼 목이 메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도 한이 많다. 
이 다음엔 정수도 장가를 들고 아빠가 되겠지. 이 녀석 결혼하면 해보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며느리 앞세워 시장에도 가고, 옷도 사주고, 같이 순대도 먹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간혹 일찍 며느리를 본 친구들이 며느리 손잡고 쇼핑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손주가 생기면 보약도 지어 먹이고, 어르르 까꿍 어르다 품에 안고 낮잠이라도 
한번 자보고 싶었는데. 
며느리가 가끔 제 잘난 맛에 까불면 따끔하게 시에미 매운맛도 보여 주리라.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바꾼다. 아니야, 그랬다가 제 남편한테 
화풀이라도 하면 큰일이지, 하며 마음을 고쳐 먹기도 했었다. 
요즘 세상의 그 이상한 며느리살이라는 것도 인희씨에겐 궁금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정말 그런 며느리들이 있을까. 내 아들 색시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째야 하나.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아들 장가는커녕 대학 등록금도 자기 손으로 못 
내주는 아쉬움에 인희씨는 목이 메이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침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인희씨는 시어머니와의 이별을 위하여 건넌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나 아범이 좋은 데 데려간대. 그런데 좀 힘들어. 집에서 어머니랑 
애들하고 그냥 쉬고 싶기도 한데 쉬엄쉬엄 가보려구 해. 그냥 이 집이 조금 
무섭네. 정 뗄라고 그러는지. 소란 피우지 말구 있어요?" 
상주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희씨는 함초롬히 젖은 눈매로 한동안 시어머니를 응시하다 손목을 꼭 쥐었다. 
"나, 가요." 
"어여 가." 
"네, 갈게요." 
잠시 두 여인의 눈빛이 마주쳤다. 찰나에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양 
상주댁도 인희씨도 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서로의 눈빛 사이로 시린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두 여인이 함께 보낸 그 긴 세월의 길목에 켜켜이 쌓인 
아픔이 이제 차차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집 앞에는 근덕이 택시를 끌고 와 미리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누나의 사정을 
전해들은 그날 오후, 근덕은 택시 운전에만 전념하며 그런 대로 착실히 일하고 
있었다. 오늘 그는 누나가 집을 비운 사이 사돈댁 노인네를 돌봐 드릴 처를 데려다 
주려고 온 것이었다. 
"상종 못할 인간!" 
근덕댁은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화를 내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의 볼멘소리에도 근덕은 묵묵히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차마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갖다 줘." 
그가 뚱한 얼굴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얼른 받아!" 
근덕은 다짜고짜 쏘아붙이며 봉투를 힐끗 보는 아내를 향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놀러 간다며? 갈 때 먹으라고 줘." 
"뭔데?" 
"호두과자야. 우리 누나, 그거 좋아해." 
근덕은 다소 밉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는 아내를 짐짓 외면하며 핸들을 잡았다. 
눈가에 어린 슬픔의 흔적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제 산 거야. 레인지에 데워 먹으라고 해. 잘난 거 먹다 목메일라." 
근덕은 누나가 있는 집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근덕댁은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머리가 
없을까. 볼수록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덕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택시를 멈췄다. 더 이상은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을 핸들이 부서져라 내리쳤다. 그리고 무너지듯 천천히 핸들에 
고개를 처박았다. 갑자기 근덕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속 
안에 감춰둔 슬픔의 덩어리를 모조리 끄집어냈다. 지나던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꺼이꺼이 큰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인희씨는 창백하고 지친 모습으로 대문을 나섰다. 근덕댁이 바로 뒤에 따라나섰다. 
"조심해 다녀오세요. 이거 반찬 몇 가지 하고, 이건 호두과자^36^예요. 그이가 
샀어요." 
"근덕이가^5,5,5,236^" 
인희씨는 올케가 건네준 호두과자 봉지를 가슴에 안았다.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짜안해져 인희씨는 봉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못난 남동생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이 이제 일 해요. 택시 회사 다시 들어갔어요." 
인희씨는 올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케가 참 고맙네." 
"뭘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인희씨는 호두과자 봉지를 소중히 안은 채 당부했다. 
"노인네 잘 모셔." 
" 네." 
인희씨는 올케 등을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근덕댁은 벌써부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고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 눈물을 뒤로 한 채 자동차로 향했다 이미 정수와 연수는 앞좌석에 
타고 있었다. 인희씨가 앞좌석 차 문을 두드리며 정수를 부른다. 
"정수야. 니가 뒤에 타고, 당신은 앞에 타요." 
정수가 아버지의 서운한 눈길을 의식하며 미적미적 뒷좌석으로 왔다. 이어 
정박사가 앞좌석으로 가 앉은 다음에 차는 천천히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근덕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는 시내를 거쳐 바로 강북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달려 
자연스럽게 자유로로 합류했다. 
"식구들끼리 소풍두 가구, 참 좋다. 근데, 길이 일산 쪽이네? 거긴 러브 호텔 같은 
것도 별로 없던데, 어디 좋은 데가 따로 있나?" 
뒷좌석에서 정수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눈으로는 운전하는 연수의 뒷모습을 마냥 
응시하며 인희씨가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물었다. 
정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때 차는 일산 보건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자신이 일하게 될 보건소를 바라보며 아내를 향해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잘 봐 둬. 당신 죽고 웬 홀애비 하나가 저기 있을 거야. 꽁지 빠진 닭처럼 늙고 
초라한 홀애비 보건소장이 말이야.' 
그러나 인희씨는 남편의 속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벌써부터 지친 얼굴이다. 
"딴 데 가지. 경치 좋은 데." 
그 말을 끝으로 인희씨는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정수는 그런 어머니를 한사코 외면한 채 굳은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인희씨는 연수가 차를 멈추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다 왔어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 
인희씨는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에 미소 지으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내가 연수랑 정리했어. 들어가자." 
인희씨는 짐 보따리를 들고 내리는 남편을 감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새집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로소 인희씨는 오늘 소풍이 자식들과의 마지막 이별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만치서 정박사가 혼자 짐을 든 채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정수야, 엄마 봐야지?" 
정수는 아까부터 한사코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인희씨가 부르자 그제서야 
고개를 조금 돌리다 도로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정수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인희씨는 그런 아들의 열린 셔츠 단추를 일일이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엄마, 낼이라도 다 쉬었다 싶으면 갈게. 울어?" 
정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 바람에 인희씨의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 방울이 튀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짐짓 장난스럽게 묻는다. 
"정수야, 나 누구야?" 
" 엄마." 
인희씨는 울지 않으려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릅뜨는 아들을 향해 방긋 웃는다. 
"한 번만 더 불러 봐?" 
"엄 마." 
정수는 기어이 목이 메어 어깨를 들썩거렸다. 
인희씨가 어린아이한테 이르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정수야, 너 다 잊어버려두 엄마 얼굴두 웃음두 다 잊어버려두 니가 
이 엄마 뱃속에서 나온 건 잊으면 안 돼!" 
정수는 무척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다. 
인희씨는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아들에게 쥐어 주었다. 
"이거 나중에 니 마누라 줘." 
인희씨는 정수가 그 반지를 받지 않고 자꾸 고개만 젓자 마침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잊어 먹을까 봐 그래. 아무리 뒤져 봐도 엄마가 이거밖에 줄게 없다, 미안해." 
정수는 인희씨 품에 안겨 이를 악물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아들을 끌어안고 있던 인희씨는 이윽고 정수를 몸에서 떼어내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내려 봐. 누나랑 할 얘기 있어." 
정수가 차에서 내렸다. 
인희씨는 힘겨운 몸짓으로 시트에 등을 기대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창 밖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연수야, 엄마가 아무래도 곧 정신을 놓칠 것 같다. 자꾸 가물가물해." 
연수는 이미 어머니가 자식들과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들을 부여잡은 채 앞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인희씨의 낮은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엄마, 연수 사랑해. 알지?" 
"네, 저도 엄마 사랑해요." 
연수는 고개를 숙인 채 인희씨 몰래 울고 있었다. 
"그래.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어머니도 울고 있는가. 목소리가 점점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나야. 엄마는 연수야." 
" 네." 
"이제 동생 데리고 가. 엄마 아버지랑 좀 쉬어야겠다." 
연수는 소리 죽여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인희씨가 목을 끌어안았다. 
"착한 우리 딸." 
인희씨의 눈물 젖은 입술이 연수의 볼에 닿았다. 
연수의 볼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26 
아이들이 가고 있다. 
인희씨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손을 흔든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가슴에, 갈비뼈에, 발등에 두루두루 불도장처럼 와서 박히는 
것 같다. 저것들이 울며 간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인희씨는 눈에 선하다. 봐야 
안다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것들의 어미인 까닭에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 채로 질근 입술을 물었다. 
죽는다는 것, 그건 못 보는 것이다. 보고 싶어도 평생 못 보는 것. 만지고 싶은데 
못 만지는 것. 평생 보지도 만지지도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이별인 것이다. 
인희씨는 석상처럼 선 채 점점이 멀어져가는 연수의 차를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잘 꾸며진 집 안을 보고 몹시 감탄했다. 옷장이며 응접 세트, 식탁, 
침대까지 모두 눈에 마뜩해 보였다. 커튼, 액자, 벽시계도 모두 자기 취향에 꼭  맞았다. 
"참 좋다. 언제 이걸 다^5,5,5,236^" 
"마음에 들어? 그냥 대충 했는데." 
인희씨는 남편의 이러한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못내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집 안 곳곳이 동화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이런 배경은 가족 삶의 행복한 
지속을 보장하는 공간인 동시에 자신에겐 영영 이별하는 아쉬운 장소, 그런 
일회성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차로 여기까지 오는데도 힘들었던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박사는 
아내를 침대에 눕혔다. 이내 인희씨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겨울 낮은 노루꼬리처럼 짧았다. 인희씨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느라 그토록 
소망하던 석양 무렵의 호수도 보지 못했다. 정박사는 오히려 다행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을 지는 광경이 아내에게 무슨 별난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스스로 노을 
지는 아내로서는 오히려 황혼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나 헤아리고 있을 게 뻔했다. 
아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정박사는 혼자 이른 만찬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서서히 호수 주변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당신, 솜씨 좋네. 새 장가 가도 되겠네." 
저녁 무렵 잠에서 깨어난 인희씨는 그가 정성껏 끓인 죽을 힘없이 받아먹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연수한테 좀 배웠지, 뭐." 
인희씨는 입으로보다 눈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었다. 
정박사는 한 숟갈이라도 더 아내 입에 떠넣어 주려 수저를 들이대는데, 그녀는 
한사코 보기만 한다. 입에 소태처럼 써서 음식이 잘 넘어가질 않는 것이다. 
"한 숟갈만 더 먹어 봐." 
"이제 차 마시자." 
정박사가 마지막으로 떠넣어 주는 죽을 마지못해 받아넘기고나서 그녀가 서툴게 
응석을 부렸다. 그런 아내를 마주보며 정박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박사는 곧 차를 끓여 거실로 가져왔다. 
"무슨 찬지 향이 좋네. 무슨 차야?" 
"몰라. 그냥 향이 좋은 차야. 훌훌 불어서 마셔. 뜨거워." 
"꼭 신혼여행 온 것 같다. 당신 공부한다고 우리 신방도 못 차리고 산 거 알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방긋 미소 짓는 인희씨를 정박사는 처연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이름도 모르고 산 차 한 잔에도 저렇게 행복해 하는 여자를 그 동안 왜 
그렇게 못해 줬던가.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한 달에 십 분만이라도 아내를 
저렇게 기쁘게 해주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이 헛헛하지는 않았을 것을. 
정박사의 사무치는 회한을 꼬집기라도 하듯 인희씨가 이내 말을 이었다. 
"말년에 복이 텄다더니, 이런 날이 올려고 그랬나 보네. 당신은 좋겠다. 이런 
집에서 앞으로 십 년을 살겠지?" 
정박사는 짐짓 아내의 말을 묵살하며 입을 열었다. 
"씻을래?" 
"힘들어." 
"힘드니까 씻어, 씻겨 줄게." 
"정말?" 
인희씨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평생 목욕은 커녕 한여름에도 물 
한 바가지 안 끼얹어 주던 남편이었다. 
정박사는 새삼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번쩍 안아들었다. 
욕조엔 이미 적당히 데워진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희씨는 다소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욕실에 들어선 
정박사는 그녀를 욕조에 걸터앉히고 한 가지씩 가만가만 옷을 벗겨 주었다. 삶은 
계란 속살처럼 희고 부드러웠던 살결이 이제는 나무껍질처럼 마르고 군데군데 멍든 
자국이 선명하다. 그러나 정박사의 눈에는 그런 아내가 전혀 험해 보이지 않는다. 
새색시인 양 여전히 곱다. 
그는 아내의 몸을 조심스럽게 욕조에 누이고 비누칠을 해서 정성껏 닦아 주었다. 
인희씨는 조금 어색해 하면서도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눈 매워." 
"그러니까 눈을 꼭 감아야지." 
"감아두 매워."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어로 말린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발그레한 홍조를 띤 인희씨 얼굴이 소녀처럼 해맑다. 
정박사는 수건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 주고 나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쁘다, 우리 마누라." 
그 말을 들은 인희씨가 갓 시집 온 색시처럼 수줍게 웃었다. 
이제 저 웃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천 년 뒤 내생의 어느 이름 모를 
마을에서, 아니면 낯선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런 데서나마 볼 수 있을까. 
곱다 그 웃음 슬프도록 곱다. 
얼마 후,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테레비라도 하나 갖다 놓을 걸, 심심하네." 
멀뚱하게 누워 있던 정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공연히 눈 둘 곳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부가 이런 시간을 가져보기는 생전 처음이라 조금은 
낯설고 멋쩍은 것이다. 
이윽고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인희씨가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소원 있어." 
"." 
"나, 무덤 만들어 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희씨는 차가운 땅속에 묻히기 싫다며 차라리 화장이 좋다고 
했었다. 그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버럭 화를 냈었는데, 정박사는 지금 그럴 
배짱도 없다. 
"언젠 답답해서 싫다구 화장해 달라매?" 
"우리 엄마 화장하니까 별루드라. 남한강에 뿌렸는데, 하두 오래되니까, 여기다 
뿌렸는지, 저기다 뿌렸는지 도통 기억에 없구. 여기 가서 울다, 저기 가서 울다 
꼭 미친 사람처럼. 당신 하구 애들은 그러지 말라구." 
정박사는 잠자코 앞만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곁에서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던 인희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당신은 나 없어도 괜찮지?" 
정박사는 말없이 아내 얼굴만 돌아보았다. 
인희씨가 그 눈길을 외면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이었다. 
"." 
"나, 보고 싶을 거는 같애?" 
정박사는 아내를 더 이상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인희씨가 또 묻는다. 
"언제? 어느 때?" 
" 다." 
"다 언제?" 
"아침에 출근하려고 넥타이 맬 때." 
" 또?" 
"맛없는 된장국 먹을 때." 
"또?" 
"된장국 맛있을 때." 
"또?" 
묻는 아내도, 대답하는 남편도 점차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를 보지 않은 채 마음속에 빗장처럼 걸려 있던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뱉어냈다. 
"술 먹을 때, 술 깰 때, 잠자리 볼 때, 잔소리 듣고 싶을 때, 어머니 망령 부릴 때, 
연수 시집갈 때, 정수 대학 갈 때, 그 놈 졸업할 때, 설날 지짐이 부칠 때, 추석날 
송편 빚을 때, 아플 때, 외로울 때." 
정박사의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인희씨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괜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도 차마 남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할 만큼 감정의 진폭이 커지고 있었다. 
"당신 빨리 와. 나 심심하지 않게." 
기어이 인희씨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정박사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도 아내를 안은 채 꺽꺽 울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인희씨가 젖은 눈을 들어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보, 나 이쁘면 뽀뽀나 한번 해 주라." 
정박사는 아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길고 오랜 영혼의 입맞춤을 나눴다. 
"너 정말 고마웠다." 
침실 가득 눈부신 햇살이 밀려들었다. 아침이었다. 햇살은 마치 무슨 축복인 양 
쏟아져 들어와 잠든 인희씨의 하얀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다. 
정박사는 잠에서 깨자마자 조용히 아내를 불러 보았다. 
"여보." 
아내는 그의 팔에 안긴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조용히 불렀다. 
"여보." 
아내를 안고 있는 오른쪽 팔에서는 이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희야!" 
정박사는 오열하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서서히 몸을 굽혀 식어 버린 아내의 몸을 부서져라 껴안아 주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며 그렇게 언제까지,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 결에 고인 슬픔인지, 깊이 잠든 인희씨의 눈에도 차디찬 물기가 서려 있었다. 

 

(저자 후기)
부모도 자식의 한이 되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녀가 내 한이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분명 나는 그녀의 한이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순하디 순한 분이셨다. 그 순함이 정도를 지나쳐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봤다면 조금 모자란다 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젊어서는 자식들 
잡기를 쥐잡듯하여 제 성질을 못 이기더니, 오십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희한하게도 
갑작스레 흰머리가 늘고 주름이 지는 상늙은이가 되더니만, 싫고 좋고도 없는 마냥 
무골인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두고 자식들은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극악한 삶의 고통이 그녀를 지치게 하지 않았겠느냐 그리 맺었다. 오십에 
그렇게 기운이 쇠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후 누가 막말을 해도 성을 안 내고, 누가 
옆에서 까무러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오십 중반에 덜컥 암에 걸렸다. 그리곤 
별로 내색도 않더니만 1 년 반의 짧은 투병 기간에도 자식들이 헉헉대자, 삼 일 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날 좋은 날 가볍게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도 임종 때의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는 편하게 웃지도, 고통스럽게 보채지도 않고 아주 건조하게 돌아가셨다.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간 지 이제 5 년. 우리의 이별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모든 의식이 어서 
끝나고 잠이나 실컷 잤으면, 잠이나 실컷 잤으면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죽은 자를 사랑하지 마라. 죽은 자 맘 아퍼 이승 문턱 못 넘을라.' 
내가 매일 어머니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한 스님이 내게 이런 식으로 
충고하셨다. 그 충고에 나는 옳다커니 싶었다. 그래, 가지 마라. 어머니 저승에 가지 
마라. 넋이라도 이승에 남아 나랑 먹고 놀자. 나랑 먹고 놀자. 
누구는 내 말이 말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제 어미 죽는 날 그리 잠만 밝혔다며, 
사랑한다는 건 뭐고, 저승까지 가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 이건 분명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랬다. 
나는 술도 안 마시면서 곧잘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 버릇은 더욱 중증이 되었다. 내 지기들은 
모두 열댓 번씩 들은 말을 나는 지금 또 하려 한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한 열흘 남짓 전의 일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일찍 퇴근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 집의 수양딸이 된 고아 친구 
향이와 성남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옥진 여사 공연을 보러 갔었다. 어머니 생전에 
처음하는 공연 구경이었고(참말이다. 물론 동네 약장수 구경은 한 적이 있었지만, 
일금 만 원짜리 공연 구경은 처음이었다), 내 생전에 어머니와 같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다. 우리는 그 공연을 참 즐겁게 봤다. 분수에 안 맞게 택시를 타고, 
분수에 안 맞게 공연 도중 걷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만 원씩이나 내면서, 분수에 
안 맞게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때가 기억난다. 나는 그냥 웃는데, 내 어머니 
구경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들 웃는 대목에서 
괜스레 눈이 붉어지며 박수를 치는데, 그 소리가 정말 우렁찼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내가 참 효녀짓을 했구나 
싶었다. 우리는 공연 구경을 다 하고, 오천 원이나 하는 공옥진 목각을 사고 
일식집으로 갔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첫 자리였다. 참, 일식집에 가기 전, 내 호의가 
과했는지 아버지는 한사코 집에서 밥 먹지 돈 주고 밥을 왜 사먹느냐 했고, 
어머니는 우리 막내딸이 뭘 사줄까 보자며 선뜻 가자 했다. 속없는 어머니. 사실, 그 
즈음 내 주머니는 허당이었다. 그러나 한번 한 말을 도로 담아 넣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일식집 문을 너무도 당당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주문을 했는데, 알탕에 
생선초밥, 그게 전부였다. 음식이 나오고, 빈약한 상차림에 스스로가 멋쩍어 나는 
서둘러 먹자 하고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아버지와 나, 그리고 향이가 
수저질을 하는데도 어머니는 도통 가만이만 계셨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 
싶었다. 다른 걸 시켜 드릴까 싶었다. 상차림이 민망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고, 나는 
그리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 얼굴을 봤는데 그 눈을 
봤는데 눈물이 그렁해 울고 계셨다. 눈물이 날 만큼 좋으셨던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사랑 받아나 봤겠니.' 내 어머니는 그렇게 싸구려 효도에도 감동하는 그런 분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두고두고 못 잊는다. 내 얼마나 그녀 알기를 소홀히  했던가. 
참 묘하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 없이 세상이 살아지니  참 묘하다. 
지금 이 후기를 제외한 이 소설은 픽션이다. 내 아버진 의사도 아니요, 난 
연수처럼 고분고분한 딸도 아니었다. 그러나 난 이 글을 쓰며 참 많이 울었다. 소설 
속의 김인희, 그녀는 내 어머니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내가 
그녀의 못난 한이었듯, 그녀 역시 이제 와 내겐 다 못한 사랑의 한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바란다. 
내세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다시 그녀의 막내딸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목숨처럼 사랑했다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초상을 
치르면서는 잠만 잤어도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로 인해 울음 운다는 걸 
그녀는 알까. 제발 몰라라. 제발 몰라라. 
이 글은 내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 본래 드라마 극본이었던 이 글을 새로이 
소설화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 그는 내 오랜 문우이며, 피를 나눈 
형제 같은, 내 어머니가 친딸처럼 여겼던 박숙정 형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글은 
나와 그 형의 합작이다. 지면을 통해 재차 박숙정 형에게 감사드린다. 
1997 년 3월 
노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