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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드라마_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2/3_노희경

Lazy Bear 2008. 11. 6. 14:3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저자: 노희경

 

 10 
정박사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내의 수술에 모든  걸 걸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실낱 같은 기대조차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정박사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진 지금, 그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모두 절망의 늪으로 바뀌어 버린 듯 쓸쓸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정박사의 절망은 곧 한없는 자기 환멸과 분노를 몰고 왔다. 
그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지독한 자기  학대뿐이었다.  얼마 후, 아내는 다시 이동 침대에 실려 병실로 돌아갔다. 
정박사는 곧 항암제 치료가 시작되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아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중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 마른 꽃처럼 앙상해질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끊어질 듯 아팠다. 
결국 그는 며칠째 아내의 병실 근처만 맴돌 뿐 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애들한테 말하세요." 
아직 다른 식구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정을 눈치챈 
윤박사가 넌지시 충고를 해왔다. 그녀의 충고는 말 그대로 아내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정박사는 들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종이컵 속에 비벼 넣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이 따위 충고나 듣자고 그녀를 찾은 건 아니었다. 
그는 아내한테 말할 수 없었던 어떤 말, 자식들에게 해줄 수 없었던 어떤 말, 
해명, 위로의 말, 합리적인 대책, 암, 죽음, 그런 건 이제 아^36^예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마치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아내 일이 모두 없었던 
일이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그는 한사코 자기 앞의 현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정선배 맘 알아요." 
정박사의 사나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지 않은 채 윤박사가 말을 이었다. 
"기적도 있을 수 있을 거^36^예요. 나도 그렇게 믿고 싶구요. 하지만 기적이 
일어날 때 일어나더라도 현재까지의 상황이 어떤지는 연수, 정수한테, 그리구 언니한테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뭘? 뭘 말해?" 
윤박사는 정박사가 거칠게 따져 묻는 말에 그녀 특유의 부드럽고 침착한 어조로 덧붙였다. 
"시간 없어요." 
"시간 많아. 죽는 데 무슨 시간이 필요해. 저승에 옷가지를 싸갈 거야, 집을 
지어 나를 거야. 죽는 덴 일 분도 안 걸린다구. 장사 치르는 덴 삼 일이면 돼.  아직 시간 많아!" 
결국은 윤박사의 사려 깊은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럴 땐  더 고통스럽다. 
정박사는 그녀의 충고를 묵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었다. 그는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선배!" 
윤박사가 그를 막아서며 안타까운 호소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느 땐 그녀가 
여자 후배라기보다는 친구나 누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애석할 정도로 통 크고 대범한 
그녀의 성격 탓이었을까. 늘 애꿋은 정박사의 화풀이 상대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매번 화해를 청하는 건 오히려 그녀쪽이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바깥으로 좀 나가요.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정박사는 윤박사의 제의대로 그녀의 진찰실을 나와 병원 뒤뜰 공원으로 향했다. 
"가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보면서 난 그런 생각을 해요. 저들은 행복하다, 저들의 가족은 행복하다." 
한동안 말 없던 윤박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정박사는 그녀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저두 하나 주세요." 
정박사는 막 불을 붙은 담배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다시 한 개비를 붙였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신 그녀가 허공을 응시하며 하던 말을  이었다. 
"난 가끔 집행을 앞둔 사형수한테도 그런 생각을 가져요. 저 사람은 행복하다." 
"무슨 소리야?" 
"그들에겐 삶을 정리할 기회가 주어진단 말이에요." 
지금 정박사는 이 여자 후배가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형 선고가 주어진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의 대가로 받는 게 있어요.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누리지 못하는 삶의 정리 기간 같은 거죠. 살면서 미안해 
했던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을 해줄 기회를 갖게 되고, 마저 사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단 말이에요." 
윤박사는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졸지에 참변을 당한 부모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병원 의사들 사이에서도 여장부로 통할 만큼 활달한 노처녀의 눈시울이 잠깐 
붉어지는가 싶었다. 이어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고 담담한 얼굴로  정박사를 응시하였다. 
"연수와 정수한테 그 말을 할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언니한테도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론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라면. 
정박사는 곤혹스러운 심경으로 윤박사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 기회마저 선배가 빼앗을 순 없어요. 원망 사실 거예요." 
윤박사의 충고는 부드러운 톤이었으나 예리했다. 
정박사는 그 예리한 충고에 가슴 한 군데가 아프게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상관없어. 맘껏, 맘껏 원망하라고 해! 그까짓 거 하나도 안 무서워." 
결국 정박사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연민에 가득찬 윤박사의 시선이 저편으로 사라지는 정박사의 맥빠진 뒷모습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입원한 지 사나흘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인희씨는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연수와 정수가 번갈아 병실을 드나드는 틈틈이 지켜본 인희씨 모습은 암 
환자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았다. 
내내 병실을 지켜가며 수발을 돕는 근덕댁도 처음에 울고볼고하던 것과는 
달리 인희씨를 휠체어에 태워서 병원 복도를 휘젓고 다니며 전처럼 수다를  떨었다. 
집 걱정만 아니면 한 며칠 휴가라도 나온 사람처럼 인희씨는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연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가 다른 환자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구 그만 좀 웃겨, 나 배 터진다. 실밥 터져." 
대부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여환자들 틈에 끼여 근덕댁의 
넉살 좋은 수다에 배를 잡고 웃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도 정박사는 병실에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꿰맨 자리 실밥을 풀 
때도 연수가 어머니를 부축해서 데려와야 했다. 
연수는 수술까지 한 어머니를 나 몰라라 방치하는 아버지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웠지만, 별 탈이 없어서 그러려니 여기며 그나마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좀 지나치다 싶긴 했다. 어머니도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몹시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며칠 항암 치료가 이어진 후로 인희씨는 밤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있었다. 
연수도 대강은 항암 치료라는 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한테나 올케한테나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때때로 쓸쓸한 표정으로 병실 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을까. 
그날도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몇 번 연수의 눈에 띄었다. 
"아버지 오시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연수가 물었다. 신경이 몰려 돌처럼 딱딱해진 
뒷덜미며 양 어깨 근육이 그간 어머니의 조바심 나는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 일 바쁠 텐데 뭐하러 오라 가라 해. 놔두고 연수 너 일찍일찍 들어가서  할머니 잘 돌봐 드려야 한다." 
인희씨는 여전히 창 밖에 나가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한손으로 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연수는 등 뒤에서 어머니를 안았다. 
"연수야." 
"네." 
"너 몇 살이냐?" 
"스물 네 살." 
"우리 딸 시집갈 때 다 됐네?" 
인희씨는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흔든다. 등 뒤에서 어머니를 껴안고 있는 연수도 리듬을 타듯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이 고즈넉한 평화. 연수가 아직 어릴 때 어머니는 가끔 놀이터에 데리고 가 
그네를 태워 주곤 했다.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린 연수를 무릎에 앉히고 
그네를 태워 주는 게 어머니에겐 가장 쉬운 스트레스 해소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럴 때마다 연수는 까닭 없이 슬프기도 했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흥얼흥얼 시름을 떨쳐 내기 위한 몇 마디 가락에 실려 그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어린 연수는 어째서 그 똑같은 동작이 어떨 땐 슬픔이 되고 어떨 땐 평화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연수는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어릴 적 그 고요한 평화를 느낀다. 
"연수야, 너 뭐하니?" 
한가롭게 몸을 흔들던 인희씨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연수는 졸음처럼 달콤한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엄마 냄새." 
"나, 냄새 나니? 벌써?" 
"응, 아주 옛날부터." 
"뭐? 어디, 무슨 냄새?" 
인희씨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연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연수도 어머니 얼굴을 빤히 응시하였다. 
엄마한텐 좋은 냄새가 나요. 어릴 적부터 그 냄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그 말을 하려다 문득 목이 메었다. 연수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화장품 냄새." 
"기집애! 병원 냄새지, 화장품은 무슨." 
밉지 않게 딸을 흘겨보는 눈가에 어느덧 골이 깊어진 잔주름이 보인다. 예의 
잔주름이 그네를 태워 주던 시절의 어머니를 세월 저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농담이에요. 엄마, 그런 거 없어요." 
"기집애, 둘러대기는." 
"정말이라니까." 
어머니가 벌써 늙었다는 증거일까. 무심코 꺼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연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형님, 뭐가 정말이라는 거예요?" 
마침 식판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던 근덕댁이 호들갑스럽게 말참견을 해왔다. 
"식사하세요. 저 그만 갈게요." 
연수는 근덕댁이 어머니의 무릎에 식판을 차려 주는 모습을 잠시 보다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병실을 나서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들어오자마자 인희씨의 팔목에 꽂혀 있는 항암 치료제 주삿바늘을  빼 버렸다. 
인희씨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근덕댁도 놀란 토끼눈으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거 왜 빼요? 치료 다 끝났어요?" 
간호사는 근덕댁이 묻는 말엔 대꾸도 없이 기둥에 매달린 주삿병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인희씨는 근덕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불안한 듯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간밤처럼 어지럽거나 떨리고 그렇지 않으시죠?" 
"네." 
간호사는 간단히 한마디 묻고는 곧 몸을 돌렸다. 
근덕댁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아서며 물었다. 
"근데, 우리 형님 어젠 왜 그런 거예요?" 
간호사는 그 말엔 대꾸도 없이 뭔지 모를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무안해진 
근덕댁이 나가는 간호사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로 이기죽거렸다. 
"병원 사람들은 너무 잘나서 그러나. 어째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한대." 
인희씨는 주삿바늘이 뽑혀 나간 팔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암이라는데 항암 
치료제는 왜 빼갈까. 간호사의 태도가 어쩐지 미심쩍었다. 어젯밤 몸살이 나는 
것처럼 춥고 어지러웠는데, 그렇다면 약을 더 줘야지 왜 멀쩡한 주사약을 
걷어가는 것인지 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의사인 남편이라도 곁에 
있으면 뭘 제대로 알 수 있을 텐데. 
"고모부가 오셔야 퇴원을 할 것인지, 상태가 어떤지 속시원히 알 텐데. 바람이 
나셨나. 어째 요즘 통 안 오시네요." 
인희씨는 마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입바른 소릴 하는 올케한테 그 
동안 꾹 참고 있었던 서운함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새 지겹나 보지. 무심한 인간. 지 여편네가 아픈지 어떤지 궁금하지도 
않나? 벌써 며칠을 안 오는 거야." 
"남자들은 다 그래요. 그저 지들만 알지." 
근덕댁이 모처럼 말이 통한다 싶었던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기세였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마 남자들은 여자처럼 멘스를 했으면 하루 
걸러 한 번씩 전쟁이 났을 거^36^예요. 그게 얼마나 아파요? 그걸 못 참아, 괜히 
여기저기 총질만 해댈 거라구요. 으이구, 징그런 족속들." 
근덕댁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진저리를 치며 식판에 담긴 밥그릇 뚜껑을  열었다. 
인희씨는 수저를 들 생각도 없이 조용히 창 밖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헐벗은 꼴로 야위어가고 있다. 그 광경을 내다보는 
인희씨의 마음도 스산하기만 하다. 문득 저게 인생이려니, 저렇게 야위어가다 
끝내는 이 세상 훨훨 떠나가는거겠지.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 인희씨의 
눈가에 문득 푸르스름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11 
'니 선배한테 좀 싹싹하게 굴어라. 네 성질 별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아직 
그만한 걸 보면 그 사람 그릇도 보통은 넘는다. 엉뚱한 사람 마음 고생시킬 
작정 아니라면 맺든 끊든 깔끔하게 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연수는 어머니의 충고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인철은 연수가 없는 동안에도 벌써 여러 차례 문병을 다녀간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보니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인철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 솔직하고 성실한,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다. 자신을 이성으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그런 선배였다. 
연수는 늘 그에게 부담을 느끼는 한편으론 자신도 모르게 그 부담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부담을 느끼는 만큼 그에게 얻어낼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내는 교활한 심리. 간섭은 원치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이끌어 내는  미묘한 여자의 심리. 
연수는 미처 자신의 이기심에 대해선 헤아려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외로울 
땐 적당히 친구나 애인의 중간쯤으로 그를 대했고, 그렇지 않을 땐 가차없이 
타인의 위치로 그를 밀쳐 내곤 했던 게 지난 몇 년 간 인철을 향한 연수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어쩌면 연수는 그 이기적인 줄 위에서 제 기분에 도취되어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한낱 어릿광대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인철은 백화점 지하 작업장에서 인부들과 섞여 일하고 있었다. 디자이너인 
그가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인철은 어떤 부분의 중요한 
인테리어에는 꼭 직접 공구를 다루곤 했다. 연수는 요란한 그라인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작업장을 가로질러 가서 인철의 어깨를 툭 쳤다. 
"간식대예요." 
인철은 새삼 환하게 웃으며 작업장까지 찾아온 연수를 반가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어 그는 잠시 그녀를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돈 봉투를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미스 김은 어디 가고, 니가 이런 걸 가져오니?" 
인철이 그라인더 스위치를 다시 누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연수는 한껏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대신 전해 준다고 하고 왔죠, 뭐." 
인철은 그라인더 스위치를 도로 꺼 버렸다. 그는 조금 멍해진 눈길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안전모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얼마쯤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작업장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선배를 잃고 싶지 않아요." 
작업장 한쪽에 쌓아 둔 자재더미에 쪼그려 앉은 채 연수가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는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투로 우울하게 고개를 꺾었다. 
연수는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인철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그 눈빛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가장 하기 어렵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가장 확실하게 해 둬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연수는 그 말을 마저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사랑하진 않아요." 
인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밴 내게 그림자 같은 사람이에요."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였다. 그 정적을 깨고 인철이 읊조리듯 말을 던졌다. 
" 그 사람 만나면 편하니?" 
"네." 
연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인철은 그런 그녀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밥 먹을 때, 내 앞에서처럼 편하게 먹을 수 있어? 김치 손으로 찢어가면서 말이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특별한 거라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썩 마음이 
편친 않지만 뭔가 특별한 감정일 거라고 말하려다 연수는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특별하면서도 익숙한 감정, 그런 게 사랑 아닐까. 하긴 영석에겐 어떤 
특별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익숙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늘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마저도 하나씩 낯설게 만들어가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가령, 인철과 함께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행동도 그 앞에선 
왠지 천박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몸을 사리게 된다. 그러나 그건, 좀더 시간이 
흐르면, 좀더 서로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문제라 여겨졌다. 
" 올라가 봐라." 
인철이 연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그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라 너무나 공허한 나머지 오히려 속이 더 깊어 보이는 그런 빈 우물 같았다. 
"저번에 내가 심하게 말한 거, 잊어버려. 쓸데없는 질투였다." 
그는 일어서는 연수의 손을 잡아 주며 어렵게 한마디 덧붙였다. 
" 다치지 마라." 
그 말뜻에 담긴 인철의 순수한 배려가 연수의 가슴으로 물결치듯 건너왔다. 
순간 연수는 수천 년 전 어떤 이름 모를 강가에서 한 전생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 
연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작업장을 걸어 나왔다. 

12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인가. 
업무차 들렀던 영석과 차를 마시며 연수는 어쩐지 그가 무척 고독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안주인의 손길에서 벗어난 남자들은 다 저런 얼굴일까. 
연수는 요즘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손수건이며 양말, 
넥타이, 양복 색깔까지 일일이 챙겨 드린다. 그런데도 집 밖에서 보는 아버지는 어느 
한 가지 꼭 빠져 있는 듯 굼뜨고 어색해 보였다. 전에 입학식 날, 어머니 없이 혼자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보며 연수가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부족감, 혹은 결핍의 냄새. 
영석에게선 문득 그런 느낌이 배어 나왔다. 
"엄마 간호한다고 얼굴이 무척 까칠하다. 힘들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조금은 풀죽은 음성으로 묻는다. 
"간호는 무슨 간호, 퇴근하고 가면 얼굴이나 잠깐 보고 오는 게 고작인데." 
연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영석을 살피듯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거긴 왜 그래요? 넥타이도 구겨지고 부인 언제 와요?" 
오늘 따라 영석이 달라 보이는 이유를 연수는 부인의 부재 때문이라고 느낀다. 
전엔 그렇지 않았다. 그 얼굴이 수척해져도 연수는 자신 때문이라 믿었고, 그가 가장 
행복한 남자처럼 웃어도 그건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랬으니까. 
헤어지면 그리움으로 살이 마르고, 같이 있으면 빈 하늘만 쳐다봐도 몸과 마음이 
가득해지는 느낌. 단 몇 시간, 단 며칠 만의 헤어짐으로도 연수는 애정 결핍증 
환자가 됐다가 그를 만나면 다시 그가 꾸며 준. 왕국의 여주인처럼 근사해졌다. 그도 
자신과 같은 궤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을까. 
부인이 언제 돌아올 예정이냐고 묻는 말에 그는 다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희미한 미소 끝에 어리는 고독 또한 연수의 몫은 아닐 것이다. 
" 언제 퇴원하셔?" 
"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아버지 성격이 원래 그래요. 말씀을 잘 안 하세요." 
그런데 당신은 참 자상해요, 난 그게 좋아요. 
연수는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입으로 소리내 말하진 않았지만,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가 빙그레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담당 의사한테 묻지?" 
"퇴근하고 가면 뵐 수가 있어야죠." 
"항암 치료가 고통스럽다던데, 어머닌 잘 견뎌내시는 것 같아?" 
"그러신 거 같아요. 심한 차멀미 증상 같은 게 있긴 하신데, 구토도 없고 머리숱도 여전하세요." 
"다행이네, 오늘 밤에두 가지?" 
연수는 가만히 눈으로만 대답했다. 
"어머니가 빨리 완쾌되시길 빌어. 우릴 위해서라도 말야. 이러다 니 얼굴 잊어 먹겠다." 
은근한 감정이 담긴 영석의 두 눈이 연수를 보고 있다. 
헤어지더라도 저 눈빛만은 영원히 못 잊을 거야. 
연수는 짙은 남색 셔츠 깃 아래 매달려 있는 영석의 물결 무늬 넥타이를 보고 
있다. 그 넥타이는 며칠 전 그의 아파트 장롱 안에서 보았던 일곱 개의 넥타이 중 
마지막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백화점 커피숍을 나와 이대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데, 
영석이 말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비상구로 통하는 문을 열고 숨기듯 
연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연수는 잠시 그의 두 팔에 안겨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마치 겨울 바다에서 듣는 파도 소리 같다. 무겁고 깊은 파도 소리. 연수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지다니. 그래, 파도 소리 
때문이야. 그 겨울 파도 소리 때문이라구. 연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가 손으로 볼을 감싸며 그녀의 입술을 찾고 있다.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와 연수의 양볼을 후끈 달게 했다. 연수는 정신이 어찔했다. 
'쉿, 이전에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다구요.' 
연수는 갑자기 자신의 양볼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계단 
아래로 한 발 물러섰다. 
" 자꾸 욕심이 생겨요. 처음엔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어요. 아, 저 
사람 눈은 저렇게 생겼구나.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기뻤어요. 그러다, 당신을 잡았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당신을 보면, 자꾸 손만 잡고 싶었어요." 
연수는 계단 옆 벽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옛이야기 하듯 자꾸 주절거리고 있었다. 
" 그리구, 이젠 자꾸 안고만 싶어요. 그래서 그래요. 입맞추게 되면 자꾸 
입맞추고 싶고, 아마 그 다음엔 자고 싶어질 거^36^예요. 그러다 혼자 남는 게 
싫어지고, 당신 보내는 게 싫어지고 그러면 당신 힘들어지잖아요." 
그녀의 쓸쓸한 미소가 건물 꼭대기까지 이어진 비상구 난간 위쪽으로 공허하게 
번져 나갔다. 영석의 얼굴도 얼마쯤 그늘져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늘진 그의 
얼굴이, 그의 눈빛이 천천히 연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연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 밝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녀의 붉어지는 
눈매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한 움큼의 비애가 오히려 연수를 
더욱 격정에 빠져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연수는 가만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때 마침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주 때맞춰 오네요." 
연수가 겸연쩍게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열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13 
노을빛이 유난히 붉은 저녁이다. 
정박사는 딸의 사무실이 있는 백화점 주변 공원에 앉아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박사는 벌써 여러 번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한숨은 커녕 
자기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세상은 참 
공평하지가 못하다. 주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더없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말이 가까울 무렵의 백화점 주변이 늘 그렇듯, 각자 쇼핑백이며 선물 
꾸러미들을 한 아름씩 안은 채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혹은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 선물을 주고받고 웃으며,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씻고 나름대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이런 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사그라드는 저녁 노을이나 바라보고 있는 늙은 
사내의 절망 따위를 누가 알겠는가.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병원에 방치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애한테 와서는, 곧 너희들은 어미 없는 자식이 돼야 할 
운명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뿐인가. 딸아이의 충격이나 고통을 어떻게 감싸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팔순 노모 대소변이라도 받아 주려면 오늘 귀가 길도 바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희망 따위에 속고 살진 않는다. 아침이 와도 희망 같은 건 없다. 
그것도 밥줄이라고 월급이 나오는 한 쫓겨나는 날까지 목을 매야 하는 직장이라는 
아수라장이 그나마 이즈음 그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아니 도피처라고 할 수도 
없겠다. 아수라장에서 아수라장으로의 이동.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삶의 
진흙탕이 나이 육십이 넘도록 일궈 온 정박사의 현실이었다. 
그 동안 그래도 이 진흙탕을 먼지 나는 신작로쯤으로 알고 살게 해준 고마운 이가 
있었기에 그런 대로 살 만한 세상이었다. 아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반 
그릇의 밥그릇도 채우지 못한 인생의 낙제생으로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밥그릇의 비어 있는 절반이 정박사의 실패한 인생이라면, 아내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머지 절반을 채워 그의 몫으로 보태 주었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일러 무엇하랴. 속절없이 죽어가는 그 착한 아내만 생각하면 정박사는 제가 쉬고 
있는 숨조차 비열하고 역겹게 느껴진다. 무턱대고 가슴이 콱콱 막힌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아내가, 평생 한 일이라곤 저 고생시킨 기억밖에 
없는 무책임한 자신에게 아무런 죄의 대가도 물어오지 않는 까닭에 정박사는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어느새 붉던 노을이 사그라지고 하늘이 청회색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연수가 살그머니 정박사 곁으로 와 앉는다. 어릴 때 같이 지낸 기억이 별로 없는 
부녀지간은 늘 그렇게 서먹서먹하다. 
정박사는 아비 노릇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는데 어느듯 이렇게 어엿한 숙녀로 
성장해 준 딸자식이 새삼 마음에 맺힌다. 
"연수야." 
담배를 세 대나 태우도록 입을 열지 못하던 정박사가 조용히 딸의 이름을 부른다. 
시선을 어디 먼 고향이라도 걸어둔 듯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래도 그냥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는 양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니 엄마." 
연수는 말이 없다. 
"니 엄마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다." 
그래도 연수는 말이 없다. 
정박사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단숨에 말해 버렸다. 
"죽을 것 같애." 
순간, 연수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말한 그대로다. 오래 못 살고 죽을 것 같다." 
연수는 끝내 자신을 외면한 채 한숨처럼 토해내는 정박사의 말을 듣다 못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든다. 
"무슨 말씀이냐구요, 그게. 수술했는데 왜 죽느냐구요?" 
" 수술 못했다." 
딸이 흔드는 대로 출렁이는 정박사의 양 어깨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꾸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사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수술 못했다. 수술 할 수가 없었다." 
연수는 그 황당한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기가 막히다는 것인지. 불과 며칠만에 어머니는 암이었다가 곧 죽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그럼,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거예요?" 
"한 달 두 달 나두 잘 모르겠다." 
그 말에 연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며 경멸하듯 외쳤다. 
"어떻게 그를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의사신데, 어떻게 그 지경까지 갈 수 있어요? 
아버지, 의사잖아요?" 
의사이기 때문에 더 할 말도, 더 어떻게 손써 볼 일도 없다는 걸, 그런 아버지의 
답답한 심정을 딸은 알지 못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연수는 갑자기 그렇게 외치며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정박사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연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성깔하며 고집이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날 밤, 연수는 윤박사를 찾아갔다. 
아버지 말만으로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독선적이고 신경질적이며, 또 쉽게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증세가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윤박사라면 뭔가 확실한 얘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수가 윤박사로부터 듣게 된 첫마디는 먼저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전, 아버지 안 믿어요." 
윤박사는 연수의 당돌한 대꾸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다. 
"아버진 의료사고를 내 멀쩡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요. 그 때문에 병원이 
넘어가고,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불 같은 아버지 성질 무서워 가뜩이나 기 못 펴고 
살던 엄마랑 우리는 더 힘들어 졌어요. 아버진, 의사로서도 아들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또 아버지로서도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덩달아 포기할 순 없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의료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버지한테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윤박사의 단호한 설득에도 연수는 좀처럼 아버지를 향한 불신의 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박사는 어린 동생 달래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 환자는 급성 위궤양으로 아버질 찾았어. 큰 병원으로 옮기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환자가 깨어나지 못했죠. 간이 나빴다죠? 당시 아버지는 명의 소리라도 
듣고 싶었겠죠. 그 명성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수술하셨던 거예요." 
"아니, 그 당시엔 간의 상태보다 위의 상태가 더 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어. 그 
환잔 아버지가 수술 안 했다면 길거리에서 바로 객사했을 거야. 단 한번의 희망도  가져보지 못하고." 
윤박사의 차분한 설득으로 아버지에 대한 오해는 다소 풀렸지만, 아직 앙금이 
말끔히 가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정작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직 하지 못한 채였다. 
"전 지금 엄마 얘길 묻고 있어요. 아버지 의견이 아닌 아줌마 의견을 듣고  싶어요." 
" 마음의 준비를 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하세요?" 
지금껏 차분하던 태도와는 달리 윤박사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다.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며 윤박사를 마구 다그쳤다. 
"수술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초기라고 했죠? 수술하면 깨끗하다고 했죠?" 
"처음 수술에 들어갈 때도 기대는 없었어. 암세포가 이미 임파선을 타고 여러 
곳으로 전이된 상태였어. 큰 것만이라도 떼내려고 개복했던 거야." 
"그런데요?" 
"할 수 없었어. 장기에 암세포가 엉겨 도저히 손을 못 댈 지경이었어." 
"그래서요?" 
연수의 반문은 점점 증오와 경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 손도 못 댔어. 간을, 위를, 허파를 모두 도려낼 순 없었어." 
"그래도 해봤어야죠! 박사가 서너 명이나 달라붙었으면서 왜 우리 엄마 한 사람 
못 살려냈어요? 살려냈어야죠!" 
어머니가 그 지경이 되도록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 연수는 그들 
모두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증오의 대상은 고통스럽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될 때까지 모를 수가 
있어요. 자식인데, 남편인데." 
"그게 암이야. 발견하기 전엔 모르구, 설사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땐 이미 늦구.  그게 암이야." 
"싫어요. 난 안 믿을래요." 
연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자꾸 
흔들어대며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줌마도, 장박사 아저씨도, 아버지도 모두 욕심 없는 분들인거 알아요. 그래서 
더 포기하기가 쉬웠겠죠. 전 안 그래요. 포기 안 할거예요." 
"포기해야 돼." 
윤박사의 어조는 단호했다. 
연수는 그에 반발하듯 더욱더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안 해요. 자식이 어떻게 엄말 포기해요. 아줌마 같으면, 아줌마 부모라면 포기하겠어요?" 
" 곁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엄마가 더 힘들 거야." 
순간 연수의 눈가에 독기가 서렸다. 
"아버지가 포기하자고 아줌말 설득했죠? 부딪혀 싸우기보단 피하는 데 능한 
분이니까, 분명 그러셨을 거예요. 전 포기 안 해요. 엄말 포기한 아버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를 향한 불신과 증오가 다시금 연수를 모질게 만들고 있었다. 
늘 착하고 정도 많은 아이였는데. 
윤박사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연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내 말 잘 들어. 우린, 장박사님과 나는 아주 오래 전에 포기했어. 하지만 아버진, 
지금 포기하신 거야." 
윤박사는 '지금' 이란 단어에 또박또박 힘을 주었다. 
잠시 분별력을 잃고 증오로 가득차 있던 연수의 표정에 얼핏 당혹감이 떠올랐다. 
윤박사가 그 기미를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가능성이 있는데 손을 놓은 게 아니야. 엄마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으로 포기하는 길을 택한 거야. 이제 우리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야." 
이젠 연수가 포기해야 할 차례였다. 아버지 말대로 집에 와선 손 하나 까딱 않고, 
그것도 모자라 늘상 바깥 일 힘들다고 짜증이나 내던 딸이, 그 종처럼 부려먹던 
어머니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연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박사를 향해 허탈하게 물었다.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글쎄,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윤박사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수를 향해 쓸쓸하게 웃는다. 
"우리 부모님은 차 사고로 한순간에 돌아가셨어. 장사 치를 땐 모르겠더니, 묻고 
집에 오니까 그때부터 눈물이 나더라. 그게 꼬박 일 년을 넘게 갔어.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잠을 자다가, 그렇게 아무데서나 눈물이 났어. 받은 건 태산 같은데 
해드린 건 하나 없는 내가 미워 눈물이 나더라구." 
윤박사의 독백은 장차 연수의 독백이기도 할 터였다. 그녀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부모의 죽음을 먼저 겪은 슬픔의 선배로서 연수에게 하나씩 하나씩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연수야, 넌 그러지 마. 네가 받은 만큼, 받은 것의 만분지 일이라도 돌려 드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밥두, 빨래두, 세수도 시켜 드려. 네가 어른이란 걸 알려 드려. 니 
걱정 때문에 가시는 길 무겁게 하지 말구." 
" 전요, 아줌마, 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다, 한 번은 다 죽는데, 
우리 엄마가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딸들은 다 도둑년이라는데 제가 이렇게 
나쁜 년인지 전 몰랐어요. 지금 이 순간두 난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보다는 
엄마가 안 계시면 난 어쩌나,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까.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 어떡해요, 아줌마?" 
연수는 제 설움에 못 이겨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 어떡해요, 이제 난 어떡해!" 
운전석에 앉아 서럽게 우는 연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윤박사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 그래도 넌 행복한 거야, 연수야. 난 후회뿐이지. 너처럼 울 기회도 없었어.' 
단 한 시간이라도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나중이 이렇듯 
허망하진 않았으리라. 
우는 연수를 바라보며 윤박사 또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14 
밤늦은 시각, 정수는 동네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 잡혀 왔으니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정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 나이에 파출소 신세나 지고 
다니는 아버지가 한심스러웠다. 그럴 시간 있으면 어머니한테나 가볼 일이지, 왜 
하필 요즘 같은 때 아버지가 자꾸 이상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정수는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며 파출소 문을 벌컥 열었다. 
파출소 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 거지 행색의 취객을 경관이 발로 툭툭 차서 깨우고 있었다. 
정수는 좀더 안쪽을 두리번거리다 구석진 곳에 등을 보인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일어나세요." 
정박사는 꾸벅꾸벅 졸다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아들을 돌아보았다. 
"너, 누구냐?" 
"정수지, 누구예요. 빨리 일어나시라니까요!" 
정수는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에 기가 먹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술기운에도 
아들의 불쾌한 낯빛에 당황한 정박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다소 얼떨떨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술을 너무 마셨던 탓인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정박사는 아직 취기가 가시자 않은 음성으로 아들을 향해 물었다.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들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아무리 술 취한 와중이라지만 정박사는 정수가 꼭 남의 자식 같이 느껴졌다. 
"어서 집으로 가세요." 
정수가 무뚝뚝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정박사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 이노무 자식아!"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정박사는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짜증을 내던 정수가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챙피하게 정말!" 
"뭐, 창피해?" 
정박사가 격앙된 어조로 다그치자 정수는 주위를 의식하며 낯을 들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흘깃거리자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려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가요." 
"애비가 챙피해?" 
정박사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 왜 이러세요, 갈수록.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이 자식이 어디서 소릴 질러. 애비한테!" 
"에이!" 
연이어 뒤통수까지 냅다 얻어맞은 정수는 금세 달려들기라도 할 듯 정박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곧 그는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포기하고 혼자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박사는 부아가 치미는 걸 참고 서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담배를 빼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사랑스런 자식인데, 겉으로는 그걸 손톱만큼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하고 있으니. 뻔히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내처 그 길로만 
가는 어이없는 행보, 그런 오죽잖은 행보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면, 
도대체 사람이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삶이란 뭐란 말인가. 
하긴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고, 자식도 머리가 굵어지면 우선 아버지라는 
존재부터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긴 그렇지. 유사 이래 어디 아버지와 문제 없는 
자식이 있기나 했겠는가. 
정박사는 파출소 앞에 멍하니 선 채 괜히 입맛을 쩝 다셨다. 뭔가 스산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몸을 푸르르 떨었다. 
평생 외길이랍시고 병원 밖 세상은 꿈도 못꿔 봤는데, 어쩌다 이 지경으로 헛헛한 
취객이 되어 여기 서 있는지. 발바닥이 닳도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추억할 만한 것도 없는 답답한 중늙은이가 되어 이젠 
등신처럼 아내의 죽음이나 기다리고 있는 이 한심한 꼴이라니. 
정박사는 절름발이처럼 휘청거리며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삐져 
나온 와이셔츠 자락 밑으로 고추장인지 뭔지 시뻘건 국물이 범벅이다. 가로등 
밑으로 가 확인해 보니 아까 안주로 먹은 매운탕 찌개 국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다. 
초저녁에 연수를 만났고, 혼자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과일가계에 들러 
연시랑 사과를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골목에서 비틀거리다 그만 봉지가 찢어져 
버렸다. 컴컴한 골목길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가는 과일들을 잡는답시고 몇 번 
넘어졌고, 어느 순간 경찰관이 왔다. 
아니 그 전에 오줌을 눈 게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경찰관과 시비가 
붙었고, 파출소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수란 놈이 왔었지. 
다시 정수를 생각하자 정박사는 얼핏 낯이 뜨거워졌다. 녀석도 어느새 장정이 다 
되었다. 아까 장소가 파출소 안만 아니었다면 녀석, 아비 하나쯤이야 거뜬히 
메다꽂을 수도 있을 기운이었다. 그렇게 든든한 아들이건만 데리고 목욕탕 한번 
가지 못했다. 매번 대학에 떨어진다고 퉁박은 주었지만, 담임선생 이름 하나 아는 게 
없었다. 저라고 그런 아비한테 무슨 정이 있었으랴. 
정박사는 조용히 철제 대문을 열었다. 아내가 입원한 뒤로는 식구들 모두 열쇠를 
가지고 다니도록 한 게 정박사 자신이었다. 아이 둘도 드나들며 병원으로, 집으로, 
직장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녀야 했으므로, 저녁까지 노모를 돌봐 주는 간병인에게 
한 가지 일이라도 덜어 주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직업 
의식이 투철한 간병인이라도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게 요즘 인심이었다. 
거실이며 이층 방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맨 먼저 
눈이 가던 곳. 이때쯤이면 아내가 안방에 앉아 빨래를 개거나 다림질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내가 거기 그러고 앉아 있는 것이 그대로 이 가정의 평화, 행복을 
상징한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왜 이제서야 깨달아지는 걸까. 이제 안방은 텅 빈 
채 어둠에 감겨 있다. 
아내의 부재, 그것은 이미 이 가정의 와해를 가장 현실감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이 가정의 일상은 밤늦게 대문 열쇠를 끼워 넣는 공허한 쇳소리로 전락해 
있고, 불 꺼진 안방의 토굴 같은 분위기로 전락해 있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고 
기다려 주지 않는 집. 대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는 집이라는 게 과연 가정이랄 수 있을까. 
집 안으로 들어선 정박사는 조용히 노모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연수가 등을 보인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옆에서 노모는 옷가지들을 잔뜩 꺼내 놓고 있다. 
"아줌마, 왜 그러고 있어? 아줌마 짐 안 싸?" 
노모는 며느리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짐을 싸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얼룩진 탓인지 꺼칠한 얼굴을 하고 연수는 넋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빨리 가자. 우리 엄마가 보기보다 성질이 더러워서 약속 시간 늦으면 
난리다! 아줌마두 빨리 짐 챙겨, 가게." 
노모가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신바람이 나서 커다란 가방에 옷을 꾸겨 넣는 
모습을 처량하게 쳐다보며 정박사는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아줌마, 안 가? 아줌마가 길 아는데, 같이 가야지. 가자, 응?" 
안에선 여전히 노모의 신명난 음성만 들려올 뿐 연수는 아무 반응도 없는 
모양이었다. 

 

15 
이튿날 아침. 
정박사는 일찍부터 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 동안의 분위기로 보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몹시 좋지 않았다. 
"정박사님이 그 동안 고생하신 건 잘 아는데, 워낙 환자가 적어서." 
아무리 작은 병원의 인사라지만 십 년 가까이 부려먹던 사람을 당장 그날로 
그만두라는 원장의 횡포에 정박사는 모멸감마저 느껴야 했다. 젊은 원장은 말하는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고압적인 자세였다. 
"김원장, 나 부탁 하나 합시다." 
정박사는 젊은 원장의 면상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여편네가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정하는 말이었지만 젊은 원장은 그 고압적인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대학병원 송박사님이 모레부터 오시기로 했습니다. 방이 없네요." 
그 말에 정박사는 오장이 뒤틀리는 듯했으나 부릅뜬 눈만 감았다 다시 떴다. 
정년을 일 년밖에 남기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면서 그 정도 배려도 안 해 주려는 이 
따위 더러운 직장엔 그도 별 애착이 없었다. 문제는 죽어가는 아내 앞에서 실직 
당한 꼴까지 보여야 하는 난감함이었다. 
원장이 앉은 쪽으론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수위실 옆이라도 있게 해 주시오. 한 달만 그렇게 있게 해 주시오. 
더는 바라지 않으리다." 
결국 그 제의 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박사로선 할 수 있는 온갖 구차한 
사정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몰골로 원장실을 나왔다. 
진찰실로 돌아온 그는 이를 악다물고 짐을 꾸렸다. 
작은 라면 박스에 짐이랄 것도 없는 집기들을 챙겨 넣으면서도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마침 그때 윤박사가 문을 열었다. 혼자서도 끙끙대며 어쩔 줄을 모르던 
그가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윤박사는 소태 씹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정박사를 차마 마주보지도 못했다. 
"무능한 인간은 뭘 해도 티가 나네." 
정박사는 짐짓 씁쓸한 너스레를 떨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짐, 니 방에 좀 놓자. 며칠이면 돼. 그래 줄 수 있지?" 
어느새 눈시울이 젖은 윤박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요즘 부쩍 눈물이 흔해졌다. 
"애들하고 마누라 볼 면목이 안 선다." 
평생 몸 바쳐 일한 흔적이 고작 라면 박스 두 개를 다 못 채웠다. 
정박사는 짐을 챙기다 말고 윤박사를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윤아" 
"" 
"집에 말하지 마라." 
" 네." 
윤박사는 이를 악물고 짐을 마저 챙기는 정박사를 몹시 곤혹스런 낯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직장에서 떨려나고 짐까지 챙겼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박사는 곧 아내가 있는 장박사의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쯤 아내의 검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환자가 치료제를 쓰고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치료제가 환자의 
몸안에서 전혀 도움을 못 주고 있단 얘기야.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머리 안 빠지고 
구토도 없으니까 좋아라 하겠지만, 의사 입장에서 그게 아니지. 너두 알잖아." 
장박사는 정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항암 치료 중단의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내의 증세로 보아 겉으론 멀쩡한 것 같지만 항암 치료가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정박사는 점점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검사 결과 나왔니?" 
"백혈구 수가 많이 떨어졌어." 
"그냥 치료 계속해." 
"벌써 지시했어. 오늘 저녁부터 치료 중단이야." 
그 말에 정박사는 매섭게 장박사를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 엉? 니 맘대로 누가 그러래?" 
"어제 연수 엄마 어지럽다고 해서 갔었어. 약 효과가 나나 했는데, 아니더군. 
경미하긴 했지만 치료제 쇼크였어. 이미 위에도 전이가 됐어." 
정박사는 더 이상 고집 피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숨만 몰아쉬었다. 
"괜한 데다 미련 갖지 마. 지금 상태에선 쇼크가 더 무서워. 내일 모레쯤  퇴원하도록 해." 
정박사는 장박사의 충고를 따르는 수밖에 더 이상의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장박사의 진찰실을 나섰다. 
저만치서 딸 연수가 공중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으나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연수는 회사에다 며칠 특별 휴가를 내고 무작정 어머니의 병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니 차마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연수는 밤새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어제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금세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연수는 우선 공중전화 부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영석은 자리에 없었다. 그날 하루 결근계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고 여직원이 일러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그만해, 그만. 전화받는데 그러면 반칙이야. 저리 가 있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깔깔대는 웃음 소리. 그는 아이들과 한참 신나게 놀아 
주던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간지럼을 타듯 유쾌한 웃음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저예요." 
"어, 잠깐만 기다려." 
갑자기 어색해진 영석의 음성. 
'여보, 나 회사에 급한 전화 왔거든? 서재 가서 받을게. 부르지 마.' 
아내한테 둘러대는 영석의 음성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 방해하지 말아야 할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연수는 지금 간절하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 동안 왜 연락 없었니?" 
"걱정했어요?" 
"그럼." 
"여기 우리 엄마 병원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요?" 
" 어떡하지. 집사람이 왔어." 
그는 허둥대고 있다. 그가 전화를 빨리 끊어 주길 바란다는 걸 느끼면서도 연수는 절실하게 매달렸다. 
"잠깐이면 돼요." 
"미안해, 나갈 수 없어." 
" 나, 지금 아주 힘들어요." 
서재 밖에서 '여보, 식사하세요.' 하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는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다. 
"집사람 있을 땐 이러지 마. 내가 낼 전화할게." 
전화는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겨 버렸다. 
연수는 단절음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한동안 귀에서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병원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16 
지지리도 복도 없는 여편네 같으니. 
정박사는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처남 근덕의 목소리에 아내가 측은한 생각부터 
들었다. 처남이 병원에 누워 있는 제 누나한테 또 돈을 뜯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준다고?" 
"그래. 못 줘." 
근덕의 험악한 목소리에 이어 아내가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박사는 후다닥 뛰어들어가서 처남의 
턱주가리라도 한 방 후려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 안 줘. 내 마누라 종처럼 부려먹고, 단돈 백만 원도 못 줘?" 
"못 줘!" 
"왜 못 줘?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개처럼 부린 품삯 달라는데, 왜 못 줘?" 
"니놈한텐 일 원 한 푼 못 줘." 
"그러는 거 아냐, 돈푼깨나 만지고 산다고, 동생 알기를 된장 항아리에 박힌 짠지 
정도로 아나 본데, 벌 받어. 지금 아픈 거, 그거 다 벌 받는 거야. 알기나 알어?" 
"당신 그러면 안 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가만히 있어, 쌍년아!" 
"내가 무슨 벌을 받어, 이놈아.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아서 벌을 받어, 이놈아!" 
"나 어리다구 우리 집 재산 빼돌려, 남편 병원 지었지? 그리구선 내가 운수업 좀 
한다구 했을 때, 두 사람 어땠어? 단돈 천만원, 그게 전부였어." 
"이놈이 터진 입이라구 하늘이 알고 땅이 알어 이놈아. 아버지 재산 니놈이, 
이 사업한다 퍼가고, 저 사업한다고 퍼가고, 밑바닥 똥창까지 박박 긁어 가 퍼 쓰고, 
이제 와 누구한테 행패야, 이놈!" 
더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다. 
근덕은 오래 전부터 틈만 나면 제 누나를 협박해 왔다. 부모 재산 다 날리고 
누나한테 뜯어간 돈으로도 모자라 평생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사는 위인이었다. 
그는 자형이란 자가 한때 병원이라도 짓고 살았던 걸 처가 재산 덕인 줄로만 믿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정박사로서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아내가 시집오자마자 
노모한테 구박을 당한 것도 다 그 있지도 않은 처가 재산 때문이었다. 맏딸을 
출가시키기도 전에 이미 달랑 집 한 채 남겨 놓고 망해 버린 장인 재산 하나 믿고  노모는 중매를 성사시켰다. 
예전에 부자였던 그 한 가지 사실만 믿고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노모의 
기대와는 달리 신부는 오히려 친정 동생 뒷바라지로 평생을 뜯어먹히며 살아왔다. 
그나마 집칸이라도 있던 것을 팔아 없앤 뒤부터는 장인 돌아가실 때 제 나이 
어렸다는 이유만으로 저렇듯 시도 때도 없이 누나를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처남을 정박사는 인간 취급도 안 하려 들었다. 
"내가 얼마나 써서? 만석지기 재산이 그렇게 쉽게 끝나! 좋아! 나 당신하고 인연 
끊은 사람이야. 두말하기 싫어. 내 여편네 데려갈 테니까, 그리 알어! 가, 이년아!" 
"형님 아퍼요. 이러지 마! 맨날 신세지다 이제 갚는구만, 당신 이러면 안 돼!" 
"신세는 무슨 개뼉따귀 같은 신세를 졌다고 그래, 너?" 
"뭐 한다고 천만 원, 뭐 한다고 오백만 원, 번번이 안 그랬어?" 
"주둥아리 닥쳐, 따라와!" 
의자 넘어지는 소리에 이어서 처남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은 
그 동안 수도 없이 당한 일이었다. 
정박사는 처남을 타일러 보기도 했고, 우격다짐으로 보려고도 했지만, 이젠 피차 
서로 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아내가 연연해 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밀곤 했다. 해서 몇 번 큰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아내의 마음을 돌려 놓진 못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남매간의 일을 가지고 
남편인 그가 나서서 무조건 다잡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그가 근덕에게 냉랭하게 구는 걸 늘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아내는 결코 남편이 끼여들기를 바라지 않을 터였다. 
핏줄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쳐죽일 악인이라 해도 
저희들끼리만은 어쩌지 못하고 어르고 보듬어야 할 생래의 의무가 있다. 
저희들끼리만 통하는 원시적 보호 본능이 있다. 이래저래 아내의 입장을 
생각한답시고 밖에서 속만 끓이고 있던 정박사는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 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거 갖고, 니 마누라 두고 가." 
아내의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뭔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척이 들려왔다. 
"안 돼요, 그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형님 병원비 낼 거^36^예요. 어서 줘요, 어서!"  

처남댁의 울먹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순식간에 근덕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또 도박하러 가지, 이 인간아! 손모가지를 잘라 버릴 거야, 내가!" 
근덕은 돈 봉투를 뺏기지 않으려 정신 없이 뛰쳐나가느라 문밖에 서 있던 자형도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날쌘지 정박사는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누굴 닮아 저렇게 염치가 바닥일까. 어떡해요. 고모부 아시면 또 난리날 텐데." 
" 설마 그 돈 줬다고 날 죽이겠어, 살리겠어. 으이구, 드런 팔자. 단돈 몇 백 
제 요량대로 쓰지 못해 벌벌 떨고. 으이구, 치사스런 내 팔자야." 
정박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내는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한쪽에선 공연히 죄 없는 처남댁이 코를 훌쩍이며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던 
중이었다. 처남댁은 갑자기 정박사가 들어서자 당황해서 딸국질까지 해대며 수선을 피웠다. 
"그래, 병원비를 내줬어?" 
잠시 후 근덕댁이 자리를 비켜 준 사이 정박사가 측은한 눈길로 아내를 보며 물었다. 
"줬어요. 왜요? 나는 그깟 돈도 내 맘대로 못 써요?" 
아내는 전 같으면 불 같이 화를 내던 남편의 성격을 의식하고 지레 겁을 
먹었던지, 아예 딴전을 피웠다. 
"평생 호강은 고사하고라도, 응, 사람이 배를 가르고 누워 있으면 하루 한 번은 
몰라도 이틀에 한번은 들여다라도 봐야지. 어떻게 사람들이 그리 무심해! 딸년을 
키우면 뭐할 거고, 아들놈을 키우면 뭐할 거고, 서방이 있으면 뭐할 거야. 나를 
어떻게 보겠어, 응? 집 쫓겨난 성질 사나운 중늙이로밖에 더 보겠어, 나쁜 
사람들 그저 날 부려먹을 궁리만 하지. 딴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라니까." 
"듣기 싫어!" 
아내의 탄식은 그대로 정박사의 가슴에 와 박히는 비수였다. 그는 무심결에 버럭 
소리를 질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내가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따지고 들었다. 
"소리 더 질러요! 소리 더 질러! 누가 무섭대?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무심했어 봐. 
당신은 아주 멸치 볶듯이 날 볶아댔을 걸." 
병원에 혼자 있는 동안 무척 속이 상했나 보다. 
정박사는 아내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따지고 말고 할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는 
새색시처럼 뾰로퉁하게 토라져 있는 아내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그만해. 그래, 돈은 있어? 낼 모레 퇴원인데." 
"살림하는 사람이 그만한 돈 없을까 봐." 
아내 음성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아마 속으로 근덕에게 돈 뜯긴 일이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래 놓고도 며칠은 남편 볼 면목도 없는 
여자처럼 기죽어 사는 게 아내의 여린 마음이었다. 
"그럼 됐어." 
정박사는 부드럽게 아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약 
봉지를 가져왔다. 간호사가 건네준 약을 입에 넣으려던 인희씨가 문득 그 알약들을 
손바닥에 쏟았다. 그녀는 뭐가 이상한지 알약 수를 일일이 헤아려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빨간 약이 두 알 안 보이네?" 
항암제 빠진 걸 아내가 알아차린 것이다. 
"이거 내 약 아닌 것 같네." 
"어디 보자." 
정박사는 대충 짚이는 게 있었지만 아내가 손을 들고 있는 알약들을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는 아내 약이다. 
"이거 맞아. 당신 거야." 
남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던 인희씨가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도로 의 자에 앉으려는 정박사를 밀쳐 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바꿔 와야 되겠네. 내 약 아니야, 이거." 
"앉아, 어딜 가!" 
"빨간 약이 항암제라며? 그게 안 들었는데 어떻게 내 약이야.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그 약을 먹었는데." 
"맞아요. 그 약 있었어요."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근덕댁까지 아내 편을 들고 나섰다. 
정박사는 일순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매사에 
까탈스럽지 않은 편인 아내가 유독 약 문제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걸 보니 문득 
가슴 한켠이 아렸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아내를 잡아끌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 약 당신 약이야. 그거 먹어. 나 의사야. 내 말 믿구, 먹어." 
"아니라니까. 간호사들이 정신 없어서 약 잘못 줄 때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구 내가 먹는 약을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시켰어." 
결국 정박사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는 도무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내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 당신 그 약 먹구 어제 힘들었다며? 그래서 내가 주지 말라고 했어." 
"미쳤나, 이 양반이? 그럼 그 주사약도 당신이 빼라 그랬어요?" 
아내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암 환자가 항암 주사 끊기고 
치료약까지 빼앗겼으니 이게 무슨 병원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짜증스럽게 흘겨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두 아픈 사람이 약을 먹어야 낫지. 의사란 양반이 도대체 
저리 가요, 약 타오게." 
인희씨는 이내 복도로 나가 버렸다. 
환자가 오래되면 절반은 의사가 된다는데, 지금 아내는 의사보다 더 옳은 말을 
하고 있다. 정박사는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아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저, 아가씨. 나 알지? 장박사님 환잔데 그 양반이 내가 힘들다고 여태 먹던 약을 뺐다네." 
다짜고짜 너스 스테이션으로 달려간 인희씨는 아무나 붙잡고 설득을 시작했다. 
간호사들은 서로 영문을 몰라 얼굴만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인희씨의 설명은 확신에 차 있었다. 
"왜 그 약 있잖아요? 빨간 캡슐에 든 거. 항암제. 나 그 약 두 알 줘." 
"약이 취소됐는데요." 
여지껏 한 번도 암이라는 단어를 자기 입에 올리지 않던 인희씨였다. 그런 그녀가 
차트판을 뒤적이고 있는 간호사에게 괜하게 미안한 표정까지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인희씨는 약을 주기 전에는 물러날 가세가 아니었다. 
"알어, 우리 집 양반하구 장박사 그 양반하구 친군데 나 힘들다구 뺐대. 
근데, 나 힘 안 드니까 그 약 줘, 응? 남자들이 괜하게 신경쓴다구 한다는 짓이 다 
그렇지 뭐. 그 중요한 약을 한때라도 거르면 쓰겠어, 줘, 응?" 
인희씨의 말은 점점 애원투로 바뀌었다. 그런 인희씨를 보며 난감해 하는 간호사 
뒤에서 몇몇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정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만 가!" 
소리 지르는 정박사보다 더 속이 상한 건 인희씨였다. 그녀는 명색이 원장 
친구라는 남편이 역성은 들어 주지 못할망정 간호사들 앞에서 무안까지 주는 게 
야속했던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요! 정말, 왜 그래? 나는 말야,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당신은 시키지두 않은 
괜한 짓을 하구. 정말 늙어갈수록 어째 그렇게 내 속을 썩여요. 하루라도 빨리 
나아야 할 거 아냐! 집에 가구 싶다구!" 
인희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버럭 화를 냈다. 정작 할 말이 없어진 정박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수간호사가 지나다 정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그녀는 인사를 
했는데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외면하는 정박사의 모습에서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수간호사가 정박사와 환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수간호사시구나. 우리 집 양반 알지?" 
"네, 알죠." 
"그 약 있잖아. 빨간 알약, 나 그거 안 받았거든." 
"아, 네. 이젠 안 아프세요?" 
인희씨는 모처럼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기가 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든든한 백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심히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수간호사가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이제 안 아퍼. 그 약 줄 거지?" 
"네. 잠시 기다리세요." 
수간호사는 선뜻 대답하고는 조제실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며 한껏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잠시 후 수간호사가 조제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인희씨에게 빨간색 캡슐 두 알을 내밀었다. 
"맞죠?" 
"맞네. 고마워요." 
인희씨는 반색을 하며 그 알약들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이어 그녀는 남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도도하게 병실로 향했다. 
"영양제예요." 
아내의 뒷모습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는 정박사를 향해 수간호사가 다소 민망해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17 
어머니의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연수는 정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껏 숨겨 왔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윤박사 말대로 어머니를 위해서나 동생을 
위해서나 옳은 일이 아니었다. 
"웬일이야, 누나가 나한테 술을 다 사구?" 
약속 시간에 맞춰 호프집에 나타난 정수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누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정수는 여지껏 어머니가 암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입원을 그저 
간단한 산부인과 수술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막내라 그런지 그 정도로도 
정수는 꽤 불안해 했었다. 그런 동생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충격을 
받을까. 연수는 입을 열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정수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침착하게 들어." 
연수는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동생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데, 그래? 사람 긴장되네."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비운 뒤 정수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이 차이가 세 살 터울밖에 안 됐지만 동생은 아직 막내 티가 역력하다. 
연수는 벌써 맥주를 서너 잔 정도 마셨다.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 보려 했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말해 봐. 누나, 뭐 고민 있어?" 
"그런 게 아니구." 
"그럼 뭐야? 왜 표정이 그러냐구?" 
"정수야." 
" 엄마 얘기야?" 
"응?" 
정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뭐야, 빨리 말해 봐." 
연수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생의 
시선을 마주보며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누나가 쉽게 입을 못 열자 정수는 이내 침착성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맥주 두 
잔을 거푸 마시며 그는 다소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눈길로 연수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연수는 입을 열어야 했다. 
"잘 들어, 정수야. 엄마 오래 못 사셔." 
" 그게, 무슨 말이야?" 
연수는 놀란 정수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남을 술을 들이켰다. 
"누나!" 
"암이야. 그것도 심한, 말기래." 
"누나?" 
정수가 술잔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누가, 엄마가?" 
"응, 엄마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 그거 간단한 수술이라며?" 
술잔을 쥔 정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연수는 정수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정수야. 아버지가 처음 내게 엄마 얘길 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어." 
"그런데?" 
"우리들 걱정할까 봐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거야." 
"그런데?" 
"그런데 엄마는 암이었고 심각하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정수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그래, 엄마가 왜 죽어!" 
주위 사람들이 두 남매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수는 주변의 눈길 따윈 무시한 채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넌 언제부터 안 거야? 누난 언제부터 안 거냐구! 나만 나만 모른 거야?" 
연수는 말없이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수의 음성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런 거야?" 
"엄마두 몰라." 
연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수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수야, 정수야!" 
다급해진 연수는 무작정 뛰어나가는 정수를 뒤따라가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정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연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면 안 돼, 정수야. 엄마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마." 
"놔!" 
"이러라고 너한테 말한 거 아냐, 정수야!" 
정수가 뒤에서 껴안고 있는 누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누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넌 내 맘 몰라. 누난 재수도 안 하구, 일류 대학 나오구, 취직도 해서 엄마 
용돈도 줘 보구, 다 했지? 누난 다 해봤지? 난 뭐야. 난 아무것도 못했잖아. 
아무것도 해준 게 없잖아. 공부한답시고 별 지랄 같은 유세 다 떨고, 맨날 술 처먹는 
꼴만 보여 줬잖아." 
울먹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정수는 마침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가 
누나의 어깨를 뿌리치며 외쳤다. 
"난 이대로 못 보내! 누난 보낼 수 있어도, 난 못 보내!" 
"이러지 마, 정수야!" 
연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정수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다. 
"놔!" 
누나의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정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사코 돌리며 
몸부림쳤다. 
연수는 차라리 동생을 대신해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러지 말자, 정수야. 이러지 말자." 
"이거 놔!" 
"더 이상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자, 우리!" 
연수는 정수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절규했다. 
이윽고 정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우리 엄마가 죽어야 한대, 왜?" 
연수는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부짖는 정수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정수의 어깨 너머로 푸른 가로등이 을씨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신경쓸 거, 안 쓸 거 분간도 못하면서. 밉살맞은 영감태기, 마누라 병문안 오면서 
그 흔한 주스 한병 안 사오고. 내 기운만 차려 봐라. 한번 호되게 들었다 놓을 테니까." 
이튿날, 인희씨는 잔뜩 골이 나서 투덜거리며 퇴원을 했다. 비록 입으론 불평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래도 꽤 흡족한 모양인지 얼마쯤 기가 살아 있었다. 
근덕댁과 연수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인희씨는 간간이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정박사는 지금 집에서 노모를 돌보고 있을 터였다. 
인희씨가 집에 돌아오자 가장 반긴 사람은 다름아닌 상주댁이었다. 상주댁은 그 
동안 며느리가 도망간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 며느리가 난데없이 돌아오자 
상주댁은 괜하게 달뜬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와 놀아 줄 기운도 없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쁜 년! 이번에 또 도망가면, 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테다!" 
상주댁은 며느리가 잠들어 있는 안방 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앉아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며느리가 야속하면서도 이렇게 돌아와 준 
게 몹시 반가웠던지 성을 내는 눈빛에 얼마쯤 안도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정박사는 그런 노모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집을 나섰다. 아내가 그토록 
소망하던 일산 새집이 완공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길이었다. 정박사는 연수의 
차를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연수는 정박사를 내려놓고 곧 회사로 돌아갔다. 
일산행 버스 안에서 정박사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공사현장에도 찾아가 보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들여 지은 집에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할 운명이란 걸 그녀가 도대체 상상이나 했겠는가. 몇 년만, 딱 
몇 년만, 아니 딱 몇 달만이라도 아내와 그 새집에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정박사는 그대로 아내와 함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정박사는 현장 소장의 안내로 새집을 둘러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나왔습니다. 워낙 찬찬하게 챙기시는 분이시라 
저희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군요." 
현장 소장이 입에 발린 공치사를 늘어놓는 것 같진 않았다. 집 안팎 곳곳에 
아내의 극성맞은 잔소리가 배어 있는 듯 모든 게 안주인의 취향 그대로였다. 
집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틀이며 바닥 공사에 이르기까지 허술하게 처리된 
곳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내는 가구 하나 없이 썰렁했지만 그런 대로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정박사는 텅 빈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다. 정갈하게 깔아놓은 
타일 바닥 색깔에 맞춰 욕조며 세면대 색상도 아내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곧이어 
그는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새집 지으면 안방 창 쪽으로 커다란 베란다를 만들 거^36^예요. 그곳에 꽃도 심고, 
작은 테이블도 하나 들여놓을 거야. 당신이랑 가끔 차도 마시고 꽃도 볼 겸. 아침 
저녁으로 해도 보고, 달도 보고. 
아내 말대로 널따란 베란다가 만들어져 있었다. 
정박사는 그 앞에 가서 한동안 굳은 듯 서 있었다. 시야가 확트인 베란다 밖으로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창가에 서서 그녀는 몹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들을 꿈꾸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새집 이야기를 했다. 새집으로 이사가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변두리 보통 늙은이로 소박하게 옛이야기나 하며 살아가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부부가 나란히 저 호수를 내려다보며 도란도란 지난 얘기나 하며 살길 바랐던 
그녀의 소박한 꿈은 이제 가망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박사는 문득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이 아내만큼 자신에게도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 방에 홀로 남아 저 호수를 내려다봐야 
할 자신의 신세도 처량하게 그지없었다. 
아내가 없으면 그림 같은 새집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썰렁한 
공간만큼이나 처량해질 자신의 앞날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집 바깥 여기저기에 공사가 끝나면서 미처 거둬 내지 못한 자재 부스러기와 
쓰레기들이 굴러다닌다. 아내가 저 모습을 본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릴 터였다. 
정박사는 이내 밖으로 나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골라 한쪽에 치워 놓았다. 얼마 안 
돼 보였는데 막상 일을 벌여 놓고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는데 쓰레기는 아무리 치워도 끝이 없었다. 그는 
웃옷을 벗어붙인 채 열심히 돌덩이, 자재 부스러기, 쓰레기들을 치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앞으로 한 달은, 아니 일 주일은, 하루는 이곳에서 살 수 있겠지. 쓰레기 더미를 
다 치우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번엔 비와 걸레를 집어들었다. 아내를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태껏 여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던 집안 청소를 해주는 일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라며 만류하는 현장 소장을 돌려보낸 뒤 
화장실 청소까지 마저 해치웠다. 늘 화장실 바닥이며 벽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비누 거품을 묻힌 솔로 박박 문질러 닦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평생 안 
해보이던 일을 있는 성의껏 흉내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대충 청소가 끝나자 집 안이 그만하게 
깨끗해졌다. 화장실 타일도 반들반들 윤이 났고, 욕조며 세면대도 말끔했다. 
정박사는 말끔해진 화장실에 선 채 가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초로의 한 
사내가 어색하게 담겨 있었다.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인희야." 
얼마 만에 불러보는 아내 이름인가. 
거울 속의 사내가, 그리고 울고 있었다. 
"죽지 마, 인희야." 
사내는 거울 속에 담긴 사내를 마주보다 이내 고개를 꺾었다. 타일 바닥으로 한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대문을 들어서던 정박사는 마당 한 구석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마주쳤다. 
"아버지, 저 술 좀 사주세요." 
정수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어렸다. 
정박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아래 포장마차에 가 있어라. 내 곧 가마." 
정수는 말없이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비틀거리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박사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부자가 무슨 비밀 얘기가 있어서 밖에서 만난대?" 
집에 오기 무섭게 또 나갈 채비를 하는 남편을 인희씨는 힘없이 바라보고 있다. 
정박사는 그녀가 이미 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벽에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도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 어째, 나 자꾸 아프네. 여보, 다리며 팔이며 온몸에 괜한 멍이 자꾸 들구."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 든 다리를 내보이며 아내가 애처로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봐, 부딪힌 데두 없는데." 
정박사는 아내가 겁먹을까 두려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진통제 먹어." 
"먹어두 그래." 
아내는 고통을 호소하기가 미안한지 고개를 떨군 채 손으로 방바닥을 문질러대고 있다. 
정박사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따가 주사 맞자. 먹는 것보단 맞는 게 빨라. 금방 나갔다 올게." 
그는 아파도 엄살 한번 못해 보고 속으로 끙끙 앓을 게 뻔한 아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죽을 때 죽더라고 고통이나 느끼지 못하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암이라는 몹쓸 병은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쥐어짜며 죽음에 이르게 
한다. 환자가 틀어쥐고 있는 자기 목숨을 순순히 내놓을 때까지 결코 그 지독한 
공격을 늦추지 않는 게 암세포라는 악마의 실체인 것이다. 
정박사는 극심한 무력감으로 다시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포장마차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부자지간에 난생 처음 가져 보는 술자리였다. 정박사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부자는 그 동안 어색한 모양새로 서로 술을 따르고 받고 
하며 두어 잔씩 마셨다. 
"아버지, 엄마 말이에요." 
이윽고 정수가 퉁퉁 부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정박사는 묵묵히 그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 엄마가 제 대학 발표날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실 순 없어요?"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려면 아직 달포는 더 기다려야 한다. 정박사로선 장담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아들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꺾고 말았다. 
"아버진 의사시잖아요. 안 되면 그래요, 식물인간 상태로라도 숨만 
끊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아버지 닮아 별루 욕심 없는 거 아시죠. 발표 
날까지만,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 주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어떤 청에도 딱 부러지게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정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요, 딱 한 번만이라도 엄말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대로 돌아가시면요, 저 
엄마 땅에 안 묻을 거^36^예요." 
정박사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이번엔 자신 있어요." 
정수가 이번에는 단언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학 들어갈 자신 있어요. 지난 번처럼 거짓말 아니에요. 이번엔 확실해요. 지난 
번 그 대학 커트라인 봤는데, 그것보다 제 점수가 20점이나 더 나왔어요. 아버진 제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으시지만, 이번엔 진짜^36^예요." 
"그래." 
"정말이에요." 
"믿는다." 
정박사는 격앙되어 호소하듯 말하는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이어 
정수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저,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 할 거^36^예요." 
정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술도 안 마시구, 공부두 열심히 할 거라구요. 장학금 받아 학교 다닐 자신  있어요." 
정박사는 아들의 기특한 결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정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아버지의 태도가 
영 불안하기만 했다. 정수는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정수야." 
"아버지, 전 엄말 이렇게 보내 드릴 수가 없어요.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서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미안해서, 죄송해서 안 돼요." 
정박사는 서럽게 흐느껴 우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정박사는 애써 삼키고 있었다. 

18 
정박사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는 병원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때맞춰 출근했다 돌아오는 그를 
실직자라고 의심할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식구들도 없었다. 
연수는 다시 며칠 휴가를 내어 집안 일을 거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안 이후로는 정수도 가급적 외출을 삼간 채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한 것처럼 나간 정박사는 하루 세 차례씩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아내의 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겉보기엔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낮이면 상주댁은 으레 소파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낮잠을 자고, 인희씨는 그 옆에서 오도카니 앉아 연수가 집안 
일 거드는 걸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그럴 때 정수는 주방 식탁이나 거실 
창가쯤에서 애처로운 눈길로 인희씨를 훔쳐보곤 했다. 인희씨는 기력이 떨어지긴 
했으나 식구들 앞에서 표 나게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느슨한 가운데 평온한 집안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낮에 장독대로 나갔던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머머, 웃기네, 웃겨!" 
거실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던 연수는 외숙모가 워낙 수다스러워 그러려니 여기며 
그대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어머니가 하던 일을 맡아 하다 보니 연수는 새삼 집안 
일에 대해 알아지는 게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언제 이 많은 일을 다 했나 싶을 
정도로 빨래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왔다. 잠시만 틈을 두면 설거지 그릇이 한 가득 
생겼고, 한 끼 한 끼 음식 장만하는 일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오늘 하루 
다림질을 해 놓아야 할 옷만 해도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머머! 안주인이 아프면 장맛부터 변한다더니, 이 한겨울에 글쎄 고추장이며 
된장이며, 독한 간장까지 옴팡 하얗게 곰팡이가 일구 말라붙은 구데기가 
버글버글한 게 난리두 아니에요, 형님!" 
그 소리에 인희씨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근덕댁이 퍼 온 
고추장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이거 보세요. 내가 골라내구 골라내구 해서 퍼 온 건데, 맛이 완전히 갔어요." 
인희씨는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내미는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고추장 그릇을 받아든 인희씨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삼십여 년 동안 장 담그며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병원 가기 전에두 멀쩡했는데. 뭔 일이래, 이게?" 
인희씨는 속상해서 혀를 끌끌 차며 장독대로 향했다. 
연수는 어머니의 뒷모습만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사람 앞에 놓고 
주책없이 호들갑 떠는 외숙모를 탓하기보다는 그 속된 미신을 차라리 무시해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가여웠다. 
연수는 주방 식탁에 앉아 있다 굳은 표정으로 제 방으로 올라가는 정수를 
의식하며 묵묵히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리처럼 곰팡이가 하얗게 주저앉았어요, 형님. 정말이에요." 
고추장 그릇을 탁자에 놓고 뒤쫓아온 근덕댁이 조심성 없이 내뱉는 말엔 대꾸도 
않고 인희씨는 먼저 된장독 뚜껑을 열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하얀 장독 
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추장 독을 열어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형님, 혹시 몸이 더 나빠지실 거 아녜요? 안주인이 아프면 펄펄 끓던 장도  순식간에 식는다는데." 
근덕댁의 속없는 말 한마디에 인희씨는 잠시 멀미를 느낀 듯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연수는 뒤에서 몰래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인희씨는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대하듯 장독 앞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죠, 형님?" 
근덕댁의 입방정은 거실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연수는 못 들은 척 빨랫감을 챙겨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인희씨가 그녀를  불렀다. 
"연수야, 아버지 건 놔둬. 엄마가 할게." 
"오늘은 제가 할게요." 
안방에 들어와 보니 이부자리도 그대로였다. 연수는 먼저 이불부터 개서 장에 
넣은 다음 작은 요와 이불을 꺼냈다. 어머니가 눕기 편하도록 한쪽에 이불을 
깔아놓은 다음, 그녀는 옷장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눈여겨보는 어머니의 옷장. 순간 그녀는 아찔한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형태로 켜켜이 쌓여 있는 아버지의 와이셔츠, 장롱 
옷걸이엔 역시 나름대로 모양을 내서 걸어둔 옷가지들. 
연수는 천천히 아랫서랍을 열어 보았다. 칸마다 아버지의 속옷이며 양말, 손수건 
등이 눈이 부시도록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꼼꼼하고 정성스런 모양새. 
연수는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는 서랍 안이 무척 낯익었다. 
문짝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예닐곱 개의 넥타이 가운데 몇 개는 매듭이 매어져 
있다. 거기까지 보고난 후 그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의 방에도 그 여자가, 사진 속의 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또다시 영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동안 연수는 적당히 핑계를 대어 그를 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가 만나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자 예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영석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집 앞에까지 와서 클랙슨을 울렸다. 어쨌거나 연수는 그를 언젠가는 
한 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석은 말없이 한강변으로 차를 몰았다. 겨울 저녁의 한강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영석의 승용차가 한강변에 멎었을 때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안 좋으신지 정말 몰랐다. 알았다면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갔을 거야."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영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그의 담배 연기는  더 이상 푸르지 않다. 
"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영석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연수는 어둠 저편으로 길게 누운 강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거둬 
영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매 끼니마다 나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사준 넥타이 떳떳하게 맬 수 
있나요? 컴컴한 비상구 말구 딴 데서 날 안을 수 있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나랑 나란히 서서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남몰래 품어 온 욕심, 그 불문율의 금기사항을 그녀가 한 가지씩 토해내고 있다. 
그녀는 별로 떨리지도, 울음을 섞이지도 않은 단조로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사랑에도 공식이 있다는 걸 오늘 알았어요. 처녀는 총각을 만날 것, 유부남은 가정만 알 것." 
영석의 고개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연수의 눈가에 한 방울  이슬이 맺혔다. 
"오늘 내 어머니한테서 당신 부인을 보았어요. 나, 잘 살게요. 좋은 남자 
만나 우리 엄마처럼, 당신 부인처럼 착하게 살 거^36^예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거예요. 내 남자는 잠버릇이 이렇더라, 나 없이는 양말 한 짝 못 
찾아 신고, 세수를 할 때면 옷이 앞섶까지 젖더라, 난 그런 남자가 하루에도 
열두번씩 보고 싶더라." 
영석은 그녀가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을 한마디씩 아프게 새긴다. 그는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가 다시금 한숨을 들이쉬듯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널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모습으로 어렵게 입을 여는 영석을 향해 연수는 시린 
가슴으로나마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녀는 이제 그를 웃으며 보내 줄 수 있다. 
"우리 인연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어요." 
십이월. 어디선가 아직 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뒤채고 있었다. 
연수는 강물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서로 마주보지 않고 작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저 어둠처럼 자꾸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거렸다. 
십 년이나 이십 년쯤 세월이 지나면 두 사람 다 오늘 이 강가에 오길 잘 했다고,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리라. 
한때는 우리 서로 사랑했으리. 비록 온전한 이름은 얻지 못했으되 그 한 조각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청춘의 한때를 위하여 연수는 기꺼이 오늘의 아픈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연수는 그렇게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다. 스물네살, 그 어줍은 첫사랑의.